팀장이 되었는데, 결정권이 없다.

결정은 위에서 하고, 설명은 아래에서 한다.

by 은이영


회사 다닌 지 15년 만에 팀장이 되었다.


회사마다 조직도, 직책 구조도 다르겠지만

우리 회사 기준으로는

영업 마케팅에서는 나보다 후배인 팀장들도 있고

스텝조직에서는 일찍 팀장이 된 편이다.

같은 업계에서는

외국계에서는 내 또래의 상무나 이사도 있지만

국내회사에서는 어린 팀장에 속했다.


꽤 오랜 시간 막내 생활을 하고

길고 긴 시간 끝에 팀장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팀장은 결정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뭘 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 순위를 세우고,

리스크를 감지하고 막는 사람.


그런데 팀장이 되고 나서 알았다.

팀장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결정은 위에서 하고,

설명은 아래에서 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


"이거 보내주세요."

"그냥 처리해 주세요."


왜 보내는지 설명 없고

왜 지금인지 설명 없는 결정.


실무자일 때는 이런 지시가 내려 오면

선후관계를 짚기도 하고 설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팀장이 되고나니

밑도 끝도 없는 지시를 군말없이 처리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

그냥 하라는 말뿐이다.


회사에서 가장 잔인한 구조는 이거다.


권한은 없는데 책임만 있는 자리


결정권이 없으면 편할 것 같지만

현실은 반대다.


결정권이 없는 사람은 결과를 만들 수 없다.

그런데 결과는 요구받는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


마치 운전대를 잡지는 못하는데

사고는 책임지는 느낌이다.


내 상사조차 이렇게 말했다.


"위에서 결정한 일이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해."


그런데 그 순간부터 나는 팀장이 아니라

회사에서 잘 굴러가는 부품이 된다.


그런데 팀원 중 이유를 묻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설명해야 한다.


결정한 사람은 설명하지 않고

설명하는 사람은 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사에서 가장 지치는 자리는

책임이 큰 자리가 아니라

권한 없이 책임만 떠안는 자리다.


가끔 이런 생각을 든다.


"나는 여기서 뭘 하는 사람이지?"


회사란 원래 불합리한 곳이고,

조직이란 원래 완벽하지 않다.


그걸 모르는 연차도 아니다.


하지만 점점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 싫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


그게 사람을 지치게 한다.


오늘도 시키는대로 처리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가 넘어갔다.


하지만 마음은 남는다.


회사에서 가장 허무한 것은

열심히 했는데 성과가 없는 것보다는

내가 뭘 잘해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반복될 때다.


혹시 이 글을 읽는 그대도

그런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까?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자리

결정은 위에서 하고, 수습은 내가 하는 자리.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능력이고,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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