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추밭길
“14반은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천 명이 넘는 공과대학부 신입생들은 전공 선택 전까지 반별로 나뉘어 생활했다.
나는 14반에 배정되었다.
“온 순서대로 줄 서세요! 줄!”
14반 팻말 아래엔 선배로 보이는 사람이, 둥그렇게 모인 새내기들을 향해 이름을 부르며
출석을 확인하고 있었다.
같은 반이었지만 다들 어색해했다.
모두 서로를 슬쩍 훔쳐보면서도, 정작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강진구!”
“네!”
“고재훈!”
“왔습니다.”
나는 내 차례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차림새였다.
패딩이나 코트에 청바지를 입고,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에 번들번들한 새 가방을 맨 모습들.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촌스럽다고 해야 할까.
나만 너무 튀는 건가 싶던 바로 그 순간.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한쪽 구석에서 흘러왔다.
에휴, 여기서 누가 담배를...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어라?!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보라...
파워레인저야 뭐야.
무지개 빛 대가리 한 무리가 모여 담배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바닥에 침을 뱉는 어떤 사람은 선배보다도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렇다.
그들은 누가 봐도 재수, 삼수... 그런 장수생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신입생 특유의 설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비릿한 냉소와 줄을 서라는 지시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엿보였다.
저들 중 일부는 다시 수능을 볼 확률이 높았다.
의학 계열 혹은 더 나은 간판의 학교를 위해 다시 세상과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변과 거리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득 재수를 선택한 친구의 얼굴이 스쳤다.
일 년 후에 만나자며 억지로 웃어 보이던 그 얼굴.
웬지 모를 씁쓸함을 털어내며 나는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박철수!”
“예.”
“심동진!”
“네~!”
출석은 가나다순인 듯, 내 이름은 아직 불리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네.
대체 뭐지, 이 위화감은...
“장성원!”
“왔어요~”
“조상우!”
“네에.”
마치 이빨에 뭔가 끼었는데 혀로는 빠지지 않는 것처럼.
뭔가 이상하고, 분명 잘못된 게 있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분.
허, 참나...
나는 다시 동기들을 훑어봤다.
수수한 패딩, 어색한 몸짓, 피하는 시선들.
“홍영기!”
담배 피는 파워레인저.
출석을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
“홍영기?!”
!!!!!
아, 아!!!!!
“홍영기 없어요?”
“와, ㅅㅂ.”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이 하얀 입김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진다.
“...?”
“아, 아. 홍영기, 저 왔습니다!”
번개처럼 스치는 깨달음!
전부-
남자들뿐이구나.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주위에 단 한 명도, 정말 단 한 명의 여학생도 보이지 않았다.
2월의 매서운 칼바람이 운동장을 휩쓸고 있었다.
신난다~ 재미난다~ 더 게임 오브 데쓰! 하하하하.
아이 엠 그라운드 자기 소개 하기~! 아싸 애기 엄마! 아싸 킹콩 샤워! 하하하하.
이 중에서 여자친구 제일 먼저 사귈 것 같은 사람은? 하나 둘 셋! 와아~ 홍영기 걸렸다!
고추밭~ 과수원 샷! 우와 남자다! 잘 마신다 홍영기. 하하하하.
하하하하.
.....
돌아가는 즉시 재수학원을 알아봐야겠다.
“우~욱.”
“괜찮어? 물 줄까?”
옆자리의 석환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2박 3일간의 ‘새터’를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
하필 맨 뒷좌석이라 자리마저 불편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술자리 게임을 마스터 한 대가는 가혹했다.
뒤끝이 제일 안 좋다는 막걸리의 무서움을, 나는 지금 온몸으로 체험중이다.
구역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디 그뿐이랴.
밤새 응원가를 익히느라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도 못했다.
군대 건빵 별사탕에는 정력감퇴제가 들어있다던데, 우리가 마신 막걸리에도 분명 무언가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눈이 풀린 남자새끼들이 떼거지로 고함을 질러대며 응원가 율동을 추던 모습은 공포를 넘어
광기 그 자체였다.
수백 번 목 놓아 부른 ‘엘리제를 위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남잔지 여잔지조차 모르는 외국인을 왜 그렇게 찾는 건지.
엘리제는 우리가 이러는 걸 알고나 있을까?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석환이가 건넨 생수를 받아 들이켰다.
굽이굽이 내려가는 설악산 길.
히터의 열기와 버스의 진동, 막걸리의 숙취가 콜라보를 이루며 오바이트가 올라온다.
“서, 석환아! 봉투 좀!”
나는 다급히 비닐봉지를 달라고 손짓했다.
“우욱!”
막걸리와 함께 조금 전에 마신 물까지 전부 쏟아냈다.
후련했다.
아, 살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다리가 축축하다.
“킁킁. 뭔 냄새야.”
“우웩, 누가 토했나 봐.”
신이시여...
What the fu*k!!!!
봉투 바닥이 뚫려 있다.
그 순간 막걸리가 버스 바닥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기어갔다.
10열, 9열, 8열, 7열...
사람들의 고개가 도미노처럼 뒤로 돌았다.
.....
음, 아무래도 기숙 학원이 낫겠지?
강남대성은 아직 자리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