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정윤이와의 첫 만남

feat. 잠룡학사 친구들

by 토박이

“영기야!”

교실 뒤편에서 영태가 날 불렀다.

반 친구 영태의 목소리만 들어도 벌써 심장이 두근거렸다.

“짜안~ 옛다!”

영태가 가방에서 두툼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핑크색 편지 봉투.

정윤이였다.

기숙사로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었기에 영태네 집 주소를 빌렸다.

“고맙다.”

“됐고, 이따 매점이나 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같은 영태의 시뻘건 얼굴이, 오늘은 러블리한 핑크빛으로 보였다.

편지를 받는 날은 오전 내내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 서랍 속 핑크색 봉투만 자꾸 만지작거렸다.

빨리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재빨리 기숙사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준영이가 눈치를 챘다.

“그거 머여? 오늘 정윤이 편지 왔냐?”

나는 대답 대신 침대에 앉아 봉투부터 뜯었다.

준영이랑 같은 방 쓰는 오정, 재현이까지 모두 달라붙었다.

“야야, 옆으로 쫌만 비켜봐야. 같이 좀 보게.”

“안 돼, 나부터 좀 보고.”

“에이, 뭐 어떠냐. 우리도 다 아는디.”

양옆에서 목을 쭉 빼고 훔쳐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애들도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지라 거머리처럼 내게 들러붙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편지를 펼쳤다.

노래 가사 같은 짧은 자작시며, 요즘 매일 듣는다는 어느 헤비메탈 밴드에 대한 찬사, 그리고 반 친구들 이야기까지.

편지지엔 곰돌이 푸우 스티커와 정윤이의 둥근 글씨체가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영기야. 보고 싶어... 넌 어떤 아이니?’

“와하하! 영기 보고 싶대! 오메 미치겄는그~”

몸을 빌빌 꼬며 꺄르르 웃는 준영이는 꼭 소녀처럼 웃어댔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귀까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 읽었다.

‘영기야. 보고 싶어...’

그 마지막 문장만 계속 눈에 들어왔다.



“영기야, 뭐 결투 신청하냐! 웃어야, 웃어!”

기성이가 카메라 뒤에서 소리쳤다.

사진관 아들인 기성이는 아버지 몰래 카메라를 훔쳐왔다.

“웃으라니까 입에다 뭔 개구기를 껴부렀냐. 아무래도 연락 끊길 것 같은디? 사진 보내는 거 말려야 쓰는 거 아니냐?”

준영이가 옆에서 깐죽거렸다.

“야, 그냥 빨리 찍어! 영기 얼굴 경련 오겄다.”

재현이가 기성이 어깨를 툭툭 쳤다.

“에이씨, 그럼 그냥 찍는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자, 이번엔 다 같이 붙어. 붙어! 같은 방 친구들도 보고 싶다고 했응께.”

준영이, 재현이, 오정이.

“오정이는 대가리 킁게 뒤로 가.”

“준영이 니는 그럼 다리 짧응게 앞으로 가.”

다들 내 뒤에, 옆에 다닥다닥 붙어섰다.

찰칵-

다시 플래시가 터졌다.

“잘 나왔냐?”

“오케이, 이번엔 괜찮다.”

기성이가 액정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 덕분이었다.

내 설렘을 함께 웃어주고, 옆에서 놀려대면서도 끝내 진심으로 응원해주던 고마운 친구들.

편지 내용을 캐묻고, 답장 쓸 때 옆에서 참견하고, 정윤이 얘기만 나오면 장난치다가도 진지하게 조언해주던 녀석들.

어쩌면 이놈들이 있었기에 나는 그 소중한 풋사랑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서 오늘 찍은 사진과 정성껏 쓴 편지를 봉투에 담았다.

거기에 기숙사 친구들의 찐한 우정도 함께...



고3 올라가던 봄방학이었다.

드디어 정윤이를 만나기로 했다.

편지와 메일, 전화로만 연락하던 우리가 마침내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장소는 서울 롯데월드.

“잘 다녀와라.”

재현이는 이번 겨울에 산 멋진 코트를 내게 빌려줬다.

“꾸겨 신으믄 디진다. 알았지?”

준영이도 한 번도 안 신은 새 구두를 건넸다.

“야, 허리 맞겄냐?”

오정이는 다리 핏을 극도로 강조한 스키니 진을 옷장에서 꺼냈다.

모두 자기 것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빌려줬다.

“영기야, 고백은 하지 말고 일단 차분히.”

“급하다고 막 달려들믄 안 돼. 알았지?”

출발 전날 밤, 녀석들은 온갖 조언을 늘어놨다.

나는 한숨도 못 자고 뒤척였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5시간.

고속버스 안에서 심장이 쉬지 않고 뛰었다.

창밖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영기야, 나 빨간 패딩에 하얀 목도리 할게. 찾기 쉽게!”

나는 어제 정윤이와 나눈 그 말을 자꾸만 되새겼다.

잠실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역 안이 북적였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약속 장소인 2번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봤다.

빨간 패딩에 하얀 목도리를 두른 소녀.

정윤이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수능 날에도 이렇게 떨릴까.

오늘 서울은 영하 10도라는데 손바닥에 땀이 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정윤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날 찾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애 앞에 섰다.

“어, 어... 안녕.”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경 너머로 정윤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부끄러워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바닥만 보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정윤이는 역시 정윤이었다.

내 속마음까지 들춰내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영기야...”

정윤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6개월 동안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편지를 쓰면서, 통화를 하면서, 수없이 상상했던 우리의 첫 만남.

한숨도 못 자고 뒤척인 밤들 끝에, 드디어 마주한 순간.

정윤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내게 건넨 첫 한마디.

“이거... 삐에로 구두야?”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