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 그리고 헤어짐

다시 길고 긴 기다림

by 토박이

아놔, 준영이 이 새끼.

내가 봐도 끝이 너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모두 편한 차림이었다.

패딩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놀이공원에 고등학생이 정장을 입고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불편해졌다.

정윤이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때부터 꼬였던 것 같다.

“저기... 뭐 타고 싶은 거 있어?”

정윤이가 물었다.

“...아무거나.”

편지로 주고받을 때는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데.

궁금한 것도, 하고 싶은 말도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만 내려다봤다.

발이 아팠다.

아니, 발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너... 괜찮아?”

“...응.”

이게 아닌데.

이렇게 만나려던 게 아닌데.

밤잠을 설치며 준비했던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한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놀이기구 하나 타지 못했다.

그저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정윤이도 점점 말이 없어졌다.

내가 너무 말이 없으니까 정윤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걷다 지쳐 벤치에 앉았을 때였다.

“...그만 들어갈래?”

정윤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늘이 무너졌다.

아니,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정윤아.

입을 열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긴장해서 그렇다고, 너를 만나 너무 좋아서 오히려 아무 말도 못했다고.

그런데 정작 내뱉은 말은.

“...그래.”

그게 전부였다.

정윤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일어났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정윤이가 뒤돌아봤다.

“그럼... 잘 가.”

“...응.”

정윤이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6개월의 기다림이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주머니 속 편지지가 구겨졌다.

만나면 정윤이에게 주려고 미리 썼던 편지.

- 정윤아, 오늘 너 봐서 정말 좋았어. 다음에 또 볼 때까지 잘 지내.

결국 꺼내지도 못한 편지.

‘에라이 천치, 바보, 등신, 모지리야!’

세상에 욕이란 욕은 다 처먹어도 싸다.

오늘 난 그랬다.

목포로 내려가는 버스 안, 눈물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야, 그때 너가 나 보고 완전 실망한 줄 알고... 내가 더 미안했다니까. 나 때문에 목포에서 서울까지 왔는데.”

“말했잖아. 너 보니까 도저히 말이 안 나왔다고.”

괜히 민망해진 나는 콜라 빨대만 휘휘 돌렸다.

“그리고 나도 너가 나 맘에 안 들어 하는 줄 알았지. 나 딱 보고 표정이-”

정윤이가 내 말을 끊더니 손을 툭 내저었다.

“친구끼리 맘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딨냐?”

친구.

그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윤이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너 패션이... 솔직히 좀 충격이긴 했지.”

“뭐가.”

“쫄바지에... 삐에로 구두.

지금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목포에선 제일 잘나가던 스타일이었는데.

“그래도... 네가 전화해준 거. 그거 진짜 고마웠어.”

그날 밤, 목포에 도착해 터미널에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손으로 누른 번호.

정윤이의 목소리를 듣고 쏟아낸 말들.

그렇게 우리는 오해를 풀었다.

그 이후였다.

정윤이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게.



화이트데이를 며칠 앞둔 밤.

“야, 잠도 안 자고 뭐 해. 뭘 그라고 하고 있냐?”

준영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종이학... 천 개 할라믄 아직 멀었다.”

“왐마, 종이학 진짜로 접는 사람 첨 본다야... 일로 몇 장 줘봐. 내가 해주께.”

“됐어, 내가 다 해야제. 종이마다 쓸 것도 있고.”

고맙긴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 눈이 동그래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에지간히 혀. 배를 갈라볼 것도 아닌디.”

준영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대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프지 않기, 밥 잘 먹기, 공부 열심히 하기, 그리고.

보고 싶다 정윤아...

내가 온 진심을 다하면 그 마음이 이루어질 거라 믿고 싶었다.

아니, 그때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연락을 이어갔다.

핑크색 봉투를 뜯을 때마다 설렜다.

정윤이의 글씨체, 종이에 밴 희미한 향기, 문장 사이사이 묻어나는 그리움...

수능만 끝나면 친구에서 풋풋한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순탄했던 우리 사이에도 조금씩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고3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왔다.

모의고사 점수, 등급, 목표 대학...

편지 속 문장들이 짧아졌다.

편지도 뜸해졌다.

2주일에 한 번, 그 다음엔 한 달에 한 번.

정윤이는 성적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가끔 하는 통화에서도 웃는 얘기 대신 한숨이 들려왔다.

정윤이는 괜찮을까, 너무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

위로의 편지를 써야 할까,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할까.

책상 앞에 앉아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깎아 먹고 있던 어느 날, 고개를 들었을 때 보였다.

모두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착실하게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숙사 친구들도, 같은 반 애들도, 모두 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만 이래도 되나 싶었다.



수능을 딱 백 일 앞둔 어느 날.

정윤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영기야.”

“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수능 끝나고 연락하자.”

‘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정윤아, 너 꼭 잘될 거야. 힘 내.”

“너도.”

전화는 그렇게 끝이났다.

전화박스 안에 한참을 서 있었다.

아쉬웠다.

아니,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최선임을 알았다.

정윤이도, 나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100일.

그 시간만 견디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때는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