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정윤이를 만나러 가다

제주 삼다도

by 토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백 일이 지났다.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그해 수능은 이상하리만치 쉬웠다.

역대급 물수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예상치 못한 이변이 속출했다.

평소보다 썩 좋은 느낌이 아니었던 나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시험에 대한 아쉬움보다 정윤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잘 못 봤으면 어떡하지.

성적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정윤이였다.

선뜻 연락하기가 두려웠다.

혹시 시험을 망쳤다면, 내 전화가 부담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 정윤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영기인데요...”

“어머, 영기구나! 잘 지냈니? 잠깐 있어 봐, 정윤이 바꿔 줄게.”

다행히 밝게 웃으시며 전화를 받으시는 정윤이 어머니였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영기야?”

정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처럼 밝았다.

“응, 나야... 시험 어떻게 봤어?”

“나? 완전 잘 봤어! 평소보다 훨씬 잘 본 것 같아.”

내 성적이 어떻든 상관없어졌다.

정윤이가 웃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영기야. 너 제주도 안 올래?”

“제주?”

“응. 아빠가 너 온다고 하면 군용 콘도 쓸 수 있게 해주신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주도.

정윤이를 만날 수 있다는 말.

“갈게. 당연히 가지!”



열아홉, 소년의 끝자락.

나는 목포에서 배를 탔다.

제주 쪽 바다만 바라본 채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케 쓸데없이 비장해? 안 춥냐? 너 지금 코 나와. 으... 난 먼저 들어간다.”

재현이는 살을 에는 추위에 목을 움츠리며 선실로 사라졌다.

바람이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저 수평선 너머, 그 섬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돌아올 땐 사랑을 쟁취한 멋진 남자로 돌아오리라.

매서운 바닷바람은 내 마음을 조금도 꺾지 못했다.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 얼어붙을까 봐 걱정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재현이가 옆에서 계속 분위기를 띄워줬고, 그 덕에 내 어깨에 걸린 긴장도 조금씩 풀렸다.

정윤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웃는 얼굴도, 말할 때의 표정도.

걸을 때마다 살짝 오다리가 되는 귀여운 습관도.

우리는 함께 한라산도 가고,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일이었다.

편지를 쓸 때마다 상상했던 그 순간들.

정윤이와 나란히 걷고,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

행복했다.



그리고.

12월 31일, 목포로 돌아가기 전날 밤.

“미안, 영기야...”

“...뭐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어, 언제부터? 그런 얘기 없었잖아.”

“우리 연락 안 할 때, 친하게 지냈었거든. 그러다가 고백을 받아서...”

“그럼 나 여기 왜 오라고 한 거야?”

“...미안해, 영기야.”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윤이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 끊을게.”

툭-

머리가 하얘졌다.

공부한대매요... 어?

집중을 하고 시-프-시-다-면서요... 어??!!

이 제주 감수광 지집아이야!!!!

역시 제주에는 돌과 바람난 여자가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다음 날 아침,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제주도를 떠났다.

도저히 정윤이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제주까지 가서 대차게 까이고 온 나는, 돌아오는 배에서 내내 열이 났다.

그 뒤로 며칠을 앓아누웠는지 모르겠다.

소식을 들은 준영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몸 좀 괜찮냐? 재현이한테 다 들었다...”

“준영아... 콜록콜록.”

“응, 말해.”

“나 죽거든, 나 신었던 그 뾰족구두 꼭 그대로 신겨서 묻어주라...”

“......”



1년 반의 사랑이 마지막으로 남긴 후유증 같았다.

열이 내릴 때마다 정윤의 얼굴도 함께 희미해졌다.

우리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만 흘러갔다.

고구려대 공대에 입학한 뒤,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지루함이 일상이 되어갈 무렵.

뜻밖에도 정윤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숨을 한 번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영기야... 나야.”

“어... 정윤아. 오랜만이야.”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낯설 만큼 차분했다.

그런데도 그 한마디만으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게. 뭐 하고 있어?”

“응, 뭐... 일찍 잘려고 누워 있었어. 너는?”

비어 있던 시간만큼 안부는 천천히 오갔다.

밥은 잘 먹는지, 요즘은 어떤지.

서로의 온도를 재는 시간이었다.



“기숙사 친구들은? 요새도 자주 만나?”

“아니, 다들 학교 다니느라 바빠서 거의 못 봐.”

“글쿠나... 근데 영기야.”

“응?”

“너 학교는?”

“나? 어...”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의대만 생각하고 달려온 걸 정윤이 알았기에, 모든 게 어긋난 기분이었다.

사랑도, 꿈도 놓친 내가 초라했다.

“고구려대 갔어. 공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뭐야. 홍영기... 진짜로?!”

“응... 공대도 나름 재밌던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그게 제일 어려웠다.

“정윤이 너는?”

정윤이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고구려대야! 너랑 같은 공대!”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