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막걸리 찬가
사발식은 일제강점기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이 막걸리를 마신 뒤 종로경찰서 앞에서 토했던 일을 기리는 행사라고 한다.
식민지 권력의 상징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토함으로써 저항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야흐로 21세기, 마시자마자 바로 토하는 이 짓을 도대체 왜 하느냐.
그건 주입식 교육의 잔재 같은, 자신이 버리고 싶은 것들을 토해 버리라는 의미라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다.
‘말이야 막걸리야’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걸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입구 쪽 바닥에 하늘빛 플라스틱 바케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높이가 1미터는 족히 되는, 원통에 가까운 깊은 통이었다.
표면에 거칠게 긁힌 자국들이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었다.
그 옆, 일렬로 나란히 붙여 놓은 테이블 위에는 같은 하늘빛 바가지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막걸리 통이 수십 개.
누가 봐도 이곳이 오늘 밤 메인 무대였다.
한쪽에선 새터 때 보았던 2학년 선배들이 오늘 마실 막걸리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도대체 왜 바케스를 저기에 둔 거지?
막걸리를 저기에 한꺼번에 부어서 바가지로 퍼 주려고 그러나?
나는 그 어마어마한 막걸리보다도 저 커다란 바케스에 자꾸 눈이 갔다.
우리는 메인 무대 맞은편,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은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거친 눈보라에 맞서는 펭귄 떼처럼 찰싹 붙었다.
이 순간만큼은 남자들끼리 맨살이 닿아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자 2학년 대표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3인 1조로 진행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술집을 가득 채웠다.
“먼저 다 마시더라도 동기 사랑으로 친구가 다 마실 때까지 막걸리 찬가를 부르며 대기하세요.”
그가 문제의 바케스를 가리켰다.
“전원이 마시면 저기 가서 전부 토하시면 됩니다.”
토하라고. 전부. 저기에.
끔찍했다.
과정은 이랬다.
FM, 그러니까 각자 자기소개를 끝내면 한 사람당 두 명의 도우미 선배가 붙는다.
한 명은 원활히 마실 수 있도록 바가지를 들어주며 응원과 페이스 조절을 해준다.
남은 한 명은 빈 바가지를 아래 받쳐 흘리는 막걸리를 받는다.
첫 바가지를 다 비우면, 아래에 받쳐 둔 바가지로 교대해 끝까지 할당량을 다 마셔야 한다.
남자는 2병, 여자는 1병.
나는 약 1.5L의 막걸리를 남김없이 원샷해야 한다.
“강진구! 강현석! 고재훈!”
호명된 애들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릴 돌아봤다.
우리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빈자리는 순식간에 메워졌다.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지금 이곳엔 남극보다 매서운 한기가 감돌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어이!)
만주~~~ 고구려대!! (어이!)
강철~~~ 공대!! (어이!)
공과~~~ 대학부!! (어이!)
잘나가는 01학번!! (어이!)
강!! (어이!)
진!! (어이!)
구!! (어이!)
여러분 앞에 당차게! 인사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콸, 콸, 콸-
세 명 모두 자기소개를 마치자, 도우미 선배들이 막걸리를 바가지에 부어댔다.
막걸리 찬가가 시작되고...
드디어 식이 거행되었다.
마셔도~ 어이! 고구려답게~ 어이! 막걸리를 마셔라~ 어이! 어이! 어이!
맥주는~ 어이! 싱거우니~ 어이! 신촌골로 돌려라~ 돌려! 돌려! 돌려!
꿀꺽 꿀꺽 우욱... 꿀꺽 꿀꺽
첫 주자였던 셋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바가지는 밑으로 새는 것 하나 없이 쭉쭉 기울어졌다.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야, 할 만 하구만 뭐.”
굳었던 얼굴에 조금씩 웃음이 돌았다.
옆 사람과 농담까지 나눴다.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촌놈 마라톤’이라는 걸 아는가.
초반 1킬로는 세계 신기록을 찍을 것처럼 빤짝한다.
그리고 곧 오버페이스.
결론적으로 완주는커녕 중도 하차하고 만다.
점점 바가지는 움직임을 멈췄고, 밑으로 새는- 아니, 흘러내리는 막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가지에서 입을 뗐다.
뜨허!!!! 하악... 하악...
복날 더위에 개가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입 떼지 마! 더 힘들어져. 입 떼지 마!”
하지만 도우미 선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다들 두 손으로 바가지만 꽉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웃음이 뚝 끊겼다.
“부어라 마셔라 막걸리! 취하도록~”
2학년 과대표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막걸리 찬가를 불렀다.
손짓으로 우리에게도 같이 부르라고 재촉했다.
눈앞에 선 세 명이 보였다.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숨이 가빠서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저건...
곧 우리 모습이다.
누군가 먼저 노래를 따라 불렀고, 옆 사람도, 또 그 옆 사람도...
팔이 조금씩 흔들렸다.
처음엔 어색하게, 그러다 점점 더 크게.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다 같이 마시자~!”
동기 세 명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바가지를 들어 올렸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막걸리를 마시고 토해내는 이 행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떨리는 손으로 바가지를 다시 드는 동기들을 보며,
목이 터져라 막걸리 찬가를 부르는 우리를 보며,
등을 두드리며 북돋우는 선배들을 보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냥 싸구려 막걸리도, 단순히 마시고 토해내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함께 견디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것을, 함께라서 겨우 넘는 것.
그게 바로 사발식이었다.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다 같이 마시자~~~!!!”
경고 :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키며,
운전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률을 높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