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를 달리는 그녀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연락을 끊고 잊고 살던 사람이, 같은 대학 그것도 같은 과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기사 공대 신입생만 천 명이 넘는 학교였으니 가능했을 일이다.
정말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설렜냐고?
음, 솔직히 말하면...
이상했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윤이 생각에 잠 못 이루던 내가 맞는데.
배신감에 휴대폰을 벽에 던질 뻔했던 그 격렬한 감정도 내 것이 맞는데.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정윤이를 보니 그저...
우리 반의 다른 두 여자 동기와 별다를 게 없었다.
터널시야 심리학이라고 들어봤나?
위험하거나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시야가 좁아지듯,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되는 심리 현상이다.
이 상황과는 거리가 있지만, 내가 좀 그랬던 것 같다.
남자 기숙사, 그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혀 있을 때는 정윤이라는 존재가 유일한 빛이었으니까.
터널을 벗어나자 빛의 필요성도 사라진 걸까.
아니면 밖에는 더 밝은 빛들이 있었던 걸까.
예전엔 매력적이었다.
편지에 적힌 시적인 표현들이며 나도 들어본 적 없는 매니악한 밴드 이름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4차원적인 농담.
독특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근데 지금은?
글쎄...
솔직히 말하면 좀 부담스러웠다.
아니, 좀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때의 나는 역시 정윤이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말들이 지금은... 헐, 얘 뭥미?
그리고 오늘, 정윤이의 패션.
분홍 원피스에 분홍빛 화장.
생각해보니 편지 봉투도 늘 분홍색이었다.
전체가... 피글렛을 떠올리게 했다.
정윤이가 달라진 걸까, 내가 달라진 걸까.
아마도 둘 다겠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됐냐고?
후훗.
정윤이는 얼마 안 가 같은 반 남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아, 예전에 사귄다던 그놈과는 진즉에 헤어졌다고 했다.
참나, 그러고 보니 얘는 터널이 아니라 그냥 통로다.
남미새도 이런 남미새가 없었다.
우리의 연락은 다시 또 자연스럽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번엔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게 정윤이는 내 삶에서 다시 한번, 아주 긴 시간동안 사라졌다.
오늘도 나는 1교시 수업을 위해 비몽사몽으로 새벽부터 일어났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초강력 슈퍼 울트라 하드 젤을 발라 만족스러운, 남자다운 스타일을 내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서둘러 지옥철을 탔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발등을 한 세 번쯤 밟히고서야 운암역에 내릴 수 있었다.
잠도 깰 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팔팔 멘솔의 시원한 박하 향이 폐 속 깊이 들어오니 정신이 조금 든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서둘러 캠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학도서관 복도를 지나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도 공기가 달랐다.
평소라면 조용히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엎드려 자는 애들이 대부분인데, 오늘은 웅성거림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품이 나오려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늘 앉던 창가 중간쯤 자리로 가방을 끌고 가며 교실을 둘러봤다.
강의실 앞쪽, 반대표 주위에 서너 명이 모여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들이 사뭇 굳어 있었다.
뭔 일이지?
가방을 내려놓는 내내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수업 시작 직전, 학생들이 거의 다 모이자 반대표가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 주목!”
반대표의 목소리에 강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우리 반 사발식이 모레 저녁 6시로 잡혔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순간 강의실이 요동쳤다.
“사발식? 그거 술 마시는 거잖아.”
“큰일 났네. 엄청 먹인다던데.”
“다른 반은 저번 주에 했는데, 몇 명 실려 갔다던데...”
걱정스러운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다들 새터에서 막걸리 지옥을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과제를 하느라 밤늦게 집에 가던 길, 학교 정문 앞에서 목격했다.
떡실신한 남학생 하나를 양옆에서 두 명이 어깨동무한 채 겨우 끌고 가던 모습.
혀가 꼬부라져 중얼거리던 그 학생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강의실 문이 열리며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어디 할 차례지?”
바스락바스락, 책 펴는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선뜻 표지를 넘기지 못했다.
옆자리 석환은 책을 펴놓았지만, 초점은 허공에 걸려 있었다.
모레, 고작 이틀.
교수님 목소리는 그날따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틀 뒤.
수업이 끝나고 시간을 때우며 어슬렁거렸지만, 시계는 어김없이 6시를 향해 갔다.
과학도서관 앞에 모인 반 애들과 함께 학교 후문을 나섰다.
석환이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궁금한 게 많은 아이라 평소라면 이것저것 물었을 텐데, 오늘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술집 앞.
계단을 오르자 막걸리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오늘...
두 발로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문 손잡이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