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정윤이 1

제주의 겨울

by 토박이

우리 반 정원 60명중에 2명.

3.33333 %

장학금 대상자냐고?

아니, 여학생이 단 두 명이란 말이다.

대학 생활의 환상은 입학 첫날 산산조각 났다.

새터에 빠진 동기들이 있어 혹시나 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그래서 전략을 수정했다.

굳이 같은 과에서 짝꿍을 찾을 필요가 있나?

동아리, 미팅, 교양 수업...

어딘가엔 분명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자 다시 대학 생활이 해볼 만해 보였다.

문제는 대학이 생각보다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였다.

미적분, 화학, 물리, 영어...

익숙한 과목들이 시간표를 빽빽하게 채웠다.

그리고 드라마처럼 설레는 이성과 나란히 앉아 듣는 교양 수업은 애초에 꿈도 못 꿨다.
왜냐하면 우리 학교는 이공계와 문과계 캠퍼스가 지하철역이 다를 정도로 분리돼 있었으니까.

군사정권 시절 반복되던 시위와 휴교 사태를 막기 위해 캠퍼스를 분리했다 한다.

새터 때 봤던 그 울부짖는 응원가와 격정적인 몸짓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빡빡한 시간표의 공대 신입생이 문과대의 훈훈한 교양 수업을 듣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학교에서 어깨가 스치고, 책을 떨어뜨리고, 눈이 마주치고, 사랑이 시작되는 거?

그건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다.

어깨를 부딪히면 서로 눈을 치켜뜨고, 발뒤꿈치를 세우며, 가슴부터 부풀리는 게 공대생이다.

또 대학 생활은 누구와 어울리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그건 보통 새터에서 결정된다.

속칭 ‘찌리’

내가 속한 방 애들은 지나칠 정도로 성실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거나 영어 학원에 다니며 자기계발에 최선을 다했다.

지각이라도 하는 날엔, 수능 답안지를 밀려 쓴 학생 같은 표정이 그대로 나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한 번쯤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며 비슷한 나날을 반복했다.

슴슴했다.

너무 슴슴했다.

이대로면 고등학교 4학년을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틀었다.

화학 실험이나 원어민 영어 수업을 같이 듣는 애들 중에서 좀 논다는 애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걔들한테 당구를 배웠다.

나는 의외로 당구에 소질이 있었다.

쌩초보였던 실력이 50에 이어 금세 80 다마가 되었다.

남들은 그때쯤 되면 칠판이 당구대로 보이고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당구공이 굴러다닌다고 하던데, 나는 당구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게다가 당구를 세게 물리는 날엔 지갑마저 가벼워져 점심까지 굶기 일쑤라 더 별로였다.

대학 생활이 참 재미없었다.

풀리지 않는 갈증.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지하철을 타고 대청역 자취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와 거리가 꽤 되는 이곳은 원래 형이 먼저 살던 곳이다.

집 형편상 따로 지낼 수 없어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형제끼리 같이 사는 게 편하냐고?

말이 되나, 다 큰 사내놈들끼리.

물론 착한 우리 형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내가 참 별 이상한 짓을...

흠, 그 얘긴 기회 되면 나중에 하기로 하자.

형은 의대생으로 근처 대학병원에서 본과 3학년 실습 중이다.

밤이면 집에 돌아와 다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범생이 중의 최고 범생이.

같은 방을 쓰다 보니 TV를 보기 힘들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볼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늘 그렇듯 햇반을 돌리고 스팸을 굽고 양반김을 뜯었다.

점심을 허술하게 먹은 날은 3분 카레를 얹거나 3분 미역국을 추가로 끓인다.

저녁 식사는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저 일찍 잠들기 위한 하나의 루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대학 생활을 위해 나는 중고등학생 6년 동안 죽어라 공부했던 말인가.

이리저리 뒤척였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낯익은 번호가 화면에 떴다.

오 마이 갓.

내 첫사랑, 정윤이다.



2000년 12월 31일, 제주도

콘도 창밖으로 제주의 겨울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재현이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진짜 해?”

“그래, 진짜 하라니까.”

“아씨 부끄러운대.”

“야, 하기만 하면 백퍼센트야. 기숙사 애들도 다 그렇다고 했잖아.”

“진짜로? 하아...”

“빨리 한잔 더 마시고 확 해버려 그냥.”

아직 고3인 우리에게 술은 불법이지만 도저히 술의 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그래, 진짜 시발 한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전화 버튼이 절벽 끝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래도 결국 눌렀다.

뚜르르~

머릿속으로 이제껏 준비했던 고백을 떠올려보았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버렸다.

뚜르르~

머릿속에서는 별별 장면이 다 스쳤다.

정말로 받으면 어떡하지.

뭐부터 말을 꺼내지.

뚜르르~

신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벌써 잠들었나.

차라리 다행인건가...

1초가 1분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때-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현이가 호기심에 가득 차 전화기로 고개를 들이밀자, 나는 녀석을 살짝 밀어내고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을 열었다.

사탕 같은 눈이 겨울밤의 제주를 하얀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정윤아...”

나에게 제주는...

정윤이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