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끝내 닿지 못한 사람에게, 끝까지 닿으려 했던 방식
나는
이중섭을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웃고 있는 그림,
엉켜 있는 선들,
가난 속에서도 따뜻했던 색.
그런데 이번 전시는
그를 ‘쓰는 사람’으로 다시 만나게 했다.
그 순간 이 전시는
보는 일이 아니라 읽는 일이 되었다.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린
<텍스트 힙(Text Hip)의 시대, 다시 쓰는 이중섭>
전시는 그를 ‘그리는 화가’가 아닌
‘쓰는 사람’으로 불러낸다.
그가 남긴 것은
캔버스만이 아니었다.
편지와 엽서,
그 위에 남겨진 문장과 선들.
그에게
쓰는 일은 표현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미술을 배우고
사랑을 만났다.
그리고 전쟁이 왔다.
가족은 먼 곳으로 보내졌고
그는 끝내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삶은 빠르게 기울었고
마흔에 멈췄다.
그러나
하나만은 남았다.
쓰는 일.
그에게 편지는 안부가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연결이었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설명이 아니라 그리움이었다.
그는
그림처럼 편지를 썼고
편지처럼 그림을 남겼다.
쓰는 순간마다
그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편지화> 닿지 못해도 계속 이어지던 방식
이중섭의 ‘편지화’는 말 그대로 편지와 그림이 한 장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형식이다.
1950년대, 전쟁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그는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리움을 글로만 담아내지 않았다. 종이 위에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직접 그려 넣고,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을 짧은 글과 함께 남겼다.
그에게 편지는 소식을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떨어진 시간을 다시 이어 붙이는 방식이었다.
전시장 한쪽,
편지화 앞에 서면
읽는 것이 아니라
마주 서게 된다.
시간이 아니라
감정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무너지는 순간에도 이름 붙여진 감정
이중섭의 〈환희〉 앞에 서면 두 마리의 닭이 보이기 전에 먼저 어떤 기운이 다가온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몸짓, 엇갈리면서도 끝내 닿으려는 방향.
그 움직임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어디에도 둘 수 없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처럼 보인다.
멀리 있는 아내와 아이들, 손에 닿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리움은 점점 형태를 잃어갔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붓은 곱게 머무르지 않는다.
칠하고, 다시 긁어내고, 또 덧칠하는 반복 속에서 감정은 점점 두꺼워지고 화면 위에 그대로 남는다.
가장자리의 테두리는 그 격한 순간을 붙잡아 두려는 듯 조용히 둘러싸고 있다.
나는 여기서 오래 머물렀다.
그가 가장 무너져 있던 시기,
그는 이름을 이렇게 붙였다.
환희.
절망의 끝에서 춤을 추는 사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는 삶에서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지만
글과 그림에서는
단 한 번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시장을 나오며
이중섭은
그림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람에게 닿으려 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이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