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으로 전달하는 말
하도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정인' 하며 등을 톡톡 쳤다. 돌아보니 마떼오였다.
"오... 정인...."
갑자기 두 팔을 벌려 다가왔다.
응? 뭐지 뭐지? 입안 가득 무언가를 물고 있는 상태로 나도 모르게 마떼오에게 안겼다. 주변 애들에게 '왜? 무슨 일이야?'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처럼 어리둥절 보는 애들도 있고 몇몇 애들은 손뼉 치고 웃으며 '굿잡!' 하고 있었다. 금세 떨어지려나 했지만, 마떼오가 더욱 안겨왔다.
사실 포옹에 익숙하지 않다.
이전 학교에서 일할 때 학교 행사며 뭐며 툭하면 서로 포옹을 하곤 했다. 세상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들 서로 안고 있는데, 사실은 그럴 때마다 어색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곤 했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일단 친밀하지 않은 사람과 얼굴이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니 내가 먼저 팔을 벌려 학생들을 안아주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색함이 학생들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내심 긴장하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 번의 포옹을 반복 경험(?)하다 보니 그것도 훈련이 되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함이 조금씩 덜해지기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사 연수에서였나, 아무튼 마지막 날 서로 안아주며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도 마지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저 등에 닿았던 손이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님이 있다. 너무 꽉 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팔만 두른 것도 아니고, 아주 적당한 세기로 나를 포옥 안아주었던 그 느낌. 그리고 내 등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놓여있던 손바닥. 마치 미온수가 담긴 핫팩이라도 갖다 댄 듯, 등 한가운데부터 따뜻한 기운이 몸으로 사악 퍼져나갔다. 포옹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눈을 감으며 감탄했던 것도 같다. 사랑, 감사, 존경, 인정, 수용, 위안... 뭉근하게 녹아드는 좋은 감정들에 나도 모르게 뭉클했다. 그냥 등에 닿아있는 손바닥으로 그런 게 느껴졌다.
밥 먹다 말고 뜬금없이 마떼오를 안으며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일까. 뭐 해야 되는 걸 안 했나? 주방 청소 오전에 빼먹었나? 나도 안 했는데? 내가 뭔가 했는데 그게 마떼오한테 도움이 되었나? 힘든 일이 있었나? 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마떼오를 더 꼬옥 안아주었다. 마떼오의 토실토실한 등 한가운데에 손을 가만히 갖다 대었다. 내 손이 전해주길 바랐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
한참 뒤에 팔을 푼 마떼오가 뭐라 뭐라 설명을 했다. '나는 해야만 했어... 널 픽(pick)했어...' 뭐 그런 소리가 왁자지껄한 가운데 들렸다. 뭐지? 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응? 아.. 오, 오키... 예~!! 마이 프렌~!!' 하고 외치며 신나게 한번 더 안아주었다. 주변에서 아이들이 하하하 웃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마떼오는 친구들과 카드게임을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끼리 규칙을 만들었다. 루저는 지정해 준 누군가와 포옹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번 짧게 안는 건 안되고, 길게 포옹하는 것이 룰이었다. 상대방이 당황하며 밀쳐낼테니 그걸 경험하는 것이 벌칙이었다. 그리고 마떼오가 그 루저가 되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다이닝룸 안에 있는 주변 인물들을 탐색하다 아이들이 고른 인물이 바로 나였다.
마떼오의 설명을 들으면서, 안아줄 때의 따뜻한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며 기분이 급변하였다. 애들이 생각하기에 마떼오를 골탕 먹일 수 있는 포옹 대상이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벼락만큼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 말도 잘 못하고 변두리에 있다 보니 이지경까지 온 건가. 이거 불링(Bullying)인가.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이건 잘못된 거라고 엄한 표정으로 말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으로 재미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소리 했을 것이다.
표정 관리가 안되는데 그렇다고 혼자 진지하고 심각해지면 그야말로 진짜 왕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까지 한꺼번에 몰아쳤다. 하지만, 마떼오가 나에게 이렇게 상황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건 최악의 신호는 아닐 거라 생각하며 혼자 조용히 진정해 본다.
"그래서, 넌 기분이 어땠어?"
하고 그저 물어볼 수밖에.
맞은편에 앉은 아이나르 샘이 내 질문에 푸핫 웃었다.
"그래,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기분이 어땠어?"
옆에 앉은 마떼오가 웃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았어요. 원래 사람들은 갑자기 포옹하면, 으으... 하면서 벗어나려고 하잖아요. 이거 규칙이 6초 이상 오랫동안 포옹하는 거였어요. 포옹을 오래 하면 사람들은 더 어색해하니까. 상대방이 막 이렇게 밀치고 표정 구겨지고 하는데도 포옹을 하는 게 벌칙이었어요. 그런데 정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를 점점 더 꼬옥 안아줬어요."
그리고 나를 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넌 굿 허거(Good Hugger)야."
아이나르 샘이 마떼오 이야기를 듣고 '우리 더 많이 허그를 할 필요가 있네'라고 말했다.
아. 아이들이 게임의 벌칙을 정해 나를 지목했지만, 벌칙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거 불링이야?' 하고 까칠하게 묻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였다. 설사 불링이었다 해도 벌칙을 수행해야 하는 누군가를 꼬옥 안아주는 굿 허거로서의 위치라면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아무렴 어떤가. 마떼오의 등을 토닥일 때의 마음은 진짜였으니, 그게 전달되었다면 좋은 일인 것이다.
마떼오와 주방청소를 함께 하며 여러 번 도와주고 했더니, 마떼오는 나를 보면 늘 합장하며 땡큐를 하고 간혹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해온다. 늘 나를 위해 천천히 여러 번 말해주어서 한편으로는 귀찮을까 싶어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마떼오에게 내가 싫은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마떼오에게 전하려던 온기는 나에게도 필요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막 학교생활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긴장과 외로움을 알아채 함께 녹여내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과 포옹할 때마다 긴장하던 내가 밥 먹다 말고 벌어진 갑작스러운 포옹에 굿 허거로 거듭난 것이다.
귀가 아닌 등으로 전달하는 말, 그래서 심장에 더 가까이 가는 것.
우리 더 많이 허그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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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나이 마흔세 살에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