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오늘 같은 날 분홍색 옷은 너무 겁나는데...
학교에 입학하고 이제 4일째인가? 5일째인가... 아무튼 그렇다. 일주일도 안되었는데 하루하루가 진짜 길게 느껴진다.
오늘은 저녁식사 시간에 '드레스 업'을 해야 했다. 2년 차 학생들이 학생회(?)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 학기 초 주간의 이런저런 이벤트를 만들고 있다. 오늘은 옷 색깔을 정해서 입고 오라는 공지가 떨어졌다.
영어로 엄청 빠르게 말해서 뭐 자세히 이해를 못 했는데, 빨강은 애인이 있다는 의미랬나? 아무튼 그렇고, 초록은 싱글이면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의미고, 노랑은 뭐 무슨 의미이고 어쩌고 저쩌고 했다. 그리고 핑크는, '나는 솔로이고 데이트를 원해요'였다. 애들이 핑크를 설명할 때 묘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문제는, 내가 지금 너네가 말한 옷색깔 중에 핑크밖에 없어...ㅠㅠ
한국에서 짐을 부치고 출발했지만 어디까지 왔는지 아직 도착을 안 했다. 캐리어에 담아 온 핑크 티셔츠 하나 흰색 티셔츠 하나로 버티는 중이라 흰색은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No meaning'이라고 했다. 없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빌리라고 하는데, 아니 내가 지금 누구한테 옷 빌릴 만큼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들 십 대 후반 뼈 마른 체격을 하고서 누구한테 빌리라는 것인가.
자 이제부터 고민 시작. 핑크를 입고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흰색을 입고 '노잼' 인간이 될 것인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운 일인가? 노잼이 되어서 그야말로 무채색 인간이 되는 것이 두려운 일인가? 핑크색 옷을 입고 'Okay~ 나랑 데이트하길 원해? 그럼 대신 나랑 대화할 때 인내심을 가져야 해. 나 영어 못하는 거 알지?' 이런 대사를 치며 호탕하게 웃을 것인가. 아니면 흰색 옷을 입고 저 구석에 앉아 관찰자가 되어 허허 어색하게 웃고 있을 것인가. 이게 뭐라고 저녁 시간 전까지 고민이 되었다. 나보다 스무 살 어린애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이 새롭게 보였다.
고민하는 동안 거실에 한 학생이 있길래, 한번 물어볼까 생각도 했다. '데이트'의 의미가 그냥 생각하는 가벼운 게 아니고 성적인 의미가 있다거나 해서 웃음거리가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역시 두려움은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인가). 외국생활 오래 한 제자한테 카톡을 보내서 '나 어째야 함?' 하고 물었는데 밥 먹는 시간까지 답이 없었다.
그렇게 어리석고 어린 생각들에 끄달리다, 문득 여기가 아니고 내가 다른 위치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학생들이 기숙사 오픈하우스 행사를 준비하며 기숙사를 방문하는 교사와 학부모에게 드레스 코드로 분홍색을 정해준 적이 있다. 그날 나는 학부모님들을 대면할 것을 생각해서 단정하게 재킷을 차려입고는 팔뚝까지 오는 긴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등장해 한껏 관심을 받았다. 그 반응에 내가 더 재미있어했던 것 같다. 교사일 때와 학생일 때의 차이인 건가? 그때는 왜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무렇지 않았던 걸까? 그때는 오히려 애들을 웃기고 싶어서 고민했었는데... 똑같은 분홍인데...
갑자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심오한 생각들이 올라왔다. 분홍 옷을 입은 나에 대해 애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게 나인가? 흰색 옷을 입어서 존재감이 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갑자기 '쏘- 딥-' 한 생각들이 몰려온 것이다. 점점 분홍 옷을 입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그 벌어진 일에 나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가 궁금해졌다.
그냥 분홍 옷을 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소심하게 분홍 옷을 안에 숨기고 식당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초록, 진초록, 올리브, 연두, 청록을 입고 나타났다. 다들 무난하게 중간 지점을 찾은 것이다. 그중에 브론윈은 하와이풍의 빨간 민소매 나시를 입고 나타났다. 하도 말라서 옷감의 양도 별로 안되어 보이는데 그 안에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이 다 들어있었다. 다들 너는 무슨색이냐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테이트는 남자 친구가 있지만 '롱디(장거리연애)'여서 솔로를 의미하는 초록색을 입고 왔다고 했다.
그 와중에 학생회 애들이 엄청나게 현란한 차림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어디서 찾아내가지고 초록색 풀을 머리에 산처럼 쌓아서 휘감고 오지를 앉나, 빨간 가발을 찾아 쓰고 온 애도 있고, 평소에 그렇게 범생 같고 착하게 생긴 남자애는 반짝이는 핑크 잠옷을 위아래로 입고 나타났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핑크 축에도 못 끼는 것이었다.
학생회 애들이 내가 입고 있는 핑크를 보고 '핑크? 나이스!' 하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비웃을까?' 하고 물으니 고개를 저으며 다들 좋아할 거라고 답해주었다. 자신들이 준비한 행사에 참여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지... 회의도 하고 나름 재미있을 거라 기대하며 준비했는데, 학생들이 시큰둥하고 참여 안 해주면 그것처럼 맥 빠지는 게 없지. 역시나 무심하게 검정이나 흰색을 입고 구석자리에 앉아있는 학생들도 있긴 했다. 핑크를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 초록 스웨터를 입고 앉아 있는 마떼오가 나에게 물었다. 오늘 같은 이벤트에 분홍 옷을 입는 건 너무 겁나는데(Scared) 어떻게 그렇게 용기 있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처음에는 못 알아 들어서 두세 번 듣고 아! 아이가릿! 했다-_-)
오늘의 분홍은 meaningful 할 수 있지만, 다른 날의 분홍 옷은 no meaning 이야. 그냥 just clothes일 뿐. 이 시간 전에 나도 좀 고민하기는 했지.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까? 하지만 내 다른 옷들은 지금 집에서 오는 중이야. 나는 색깔 옷이 이거 한 벌 밖에 없으니 중요한 옷이고 벌거벗은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저기 쟤네들을 봐라, 엄청 용기 있지 않냐. 별거 아냐.
마떼오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무엇이 겁나냐고 하니, 고민하는 얼굴로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맞다.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겁내고 있는 걸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남들이 보는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겁내는 것을 정말 많이 본다. 만약 교사 입장에서 학생이 행사 때 입을 옷 색깔로 고민하고 있는 걸 봤다면,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 옷 색깔로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한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 말들이 학생 입장이 되니 애초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것에 비해, 내 존재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별것 아닌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으로 보였다 한들,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만나고 있는데 항상 바늘구멍같이 작은 틈으로 세상을 보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옷이 없어서 내일도 분홍 옷을 입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내 짐은 언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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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나이 마흔세 살에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