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날 사랑하지 않는 널 사랑하는 일

이유는 없어 그냥 널 OO해

by 정인

"걔가 널 싫어하거나 그런 건 아닐 거야."

라고 루스 마리 선생님이 말했다. 학교생활하며 힘든 일 없냐는 질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 말이었다. 선생님은 그가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것 같다고 이어서 말해주셨다.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는 수다스럽게 떠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영어도 나보다는 훨씬 잘했다. 그런데도 내가 뭔가를 물으면 '응, 아니' 혹은 단답형의 대답을 했다. 게다가 다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그는 유독 노르웨이어로 말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노르웨이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순간적으로 소외되었다. 간혹 선생님이 함께 있으면 내용을 요약해서 '지금 이런 이야기 나누고 있어' 정도를 공유해 주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면 가차 없이 다른 세상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잘 어울리는 걸 보았기 때문에 내성적인 성격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종종 차갑게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엔 그냥 '아시안이 어색한가?'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러다 내가 옆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조금 상처가 되었다. 선생님이 '그럴 리 없어'라는 의미의 친절하고 따뜻한 웃음을 보여주시는데, 교사로서 짓는 의도적인 미소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다.


"샘, OO이가 날 싫어하는 거 같아요."

얼마나 많이 들었던 말인가. 학기 초 서로를 탐색하는 역동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관계 형성이 될 즈음이면 면담 자리에서 어김없이 나오는 주제이다. 아무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둥, 아무개가 한 행동은 자기한테 일부러 한 것이라는 둥, 상황도 가지가지. 객관성을 잃은 질풍노도의 교실에서 판단은 늘 주관적이다. 슬슬 한 사람에 대한 왜곡된 편견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받고자 하는 비합리적 신념의 땅 위에 그 뿌리는 점점 더 단단해진다. 그리고 '느낌적인 느낌'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가지를 펼친다.


그렇게 미움받는 일을 두려워하는 학생들이 내 앞에 앉아 눈물 콧물 빼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나는 관찰된 사실과 관찰되지 않은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해 주고, 추측과 짐작의 잔가지를 쳐내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주고자 노력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라고 생각한다. 그런 교사였던 나! 그랬던 내가 지금 선생님 앞에서 'OO이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요' 하고 말하고 있다. 나보다 스무 살 넘게 어린 녀석한테 미움받고 있다며 속상해하는 나. 하.


'자신감을 가져!'라는 말은 꽤나 무책임하다. 자신감이라는 것은 나 혼자 자체생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 안에서 상호교환되는 무엇이 내 자신감의 재료가 되니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그 앞에서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말과 행동을 신경 쓰다가 종국에는 눈에 띄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그가 노르웨이어로 말하기 시작할 때 '왜? 뭐가?' 하며 끼어들기를 시전 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귀를 닫고 딴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알아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주는 나름의 배려도 해주었다.


강하게 몰아치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은근한 배제와 미움이 이어졌는데, 시간이 가면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가 희미해져갔다. 점점 그 녀석이 불편해졌다. 공간에 있으면 신경이 쓰이고, 저들끼리 노르웨이어로 낄낄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짜증이 올라왔다. 문득, 그 녀석이 나를 꺼린다는 생각에 내가 그 녀석을 불편해하는 것인지, 내가 그 녀석을 불편해하는 느낌이 전달되어 그 녀석이 나를 싫어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자기를 싫어할까 봐 걱정하던 학생들이 자주 떠올랐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기로는 매한가지일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은, 격정적인 사직서를 던지고 나갔던 동료 교사도 떠올랐다. 자기를 왜 그렇게 싫어하냐며 눈물짓곤 했는데, 남은 선생님들이 많은 상처를 받았다. 누가 누구를 미워했던 것인지 묘연하다. 오래전 연인도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는 사랑을 외치던 목소리 크기만큼 미움을 키웠다.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그 괴로움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랑도 미움도 한뿌리에서 나고 자란 열매인 것이다. 이 처연한 마음들을 초연하게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른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몰래 산타가 되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는 이벤트가 기획되었다. 상대방 이름을 배정받으면 그 친구 몰래 선물을 준비해서 방 앞에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녀석의 이름을 받았다!

아.


하지만 나는 어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 흠...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사서 조심조심 포장을 했다. 엽서 크기로 종이를 잘라 손수 그림도 그렸다. 푸른색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 하얀 눈, 사이좋게 보이는 나무 두 그루를 그렸는데, 마음에 들었다. 뒷면에는 노르웨이어 인사말을 넣었다.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이 되지 않게 한국어, 영어, 노르웨이어를 오가며 여러 번 확인했다. 종이 위로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글자를 썼다. 예전에 담임을 맡던 시절, 학생들 한 명 한 명 생일카드를 만들어주던 기억이 났다. 손으로 그리고 오리고 붙여가며 정성 가득 만들었던 생일카드. 평소 욕지거리에 온갖 행패를 부리던 학생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자정이 넘은 한밤중,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문에 붙은 그의 이름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영상에 나올법한 움직임으로 선물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몰래 산타한테 선물 받았어?"

"응."

"뭐 받았어?"

"초콜릿이랑 엽서."

"하하, 그렇구나, 좋네."


크리스마스 행사를 앞두고 전교생이 함께 커플댄스를 연습하던 날이었다.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추다 보니 어느새 그 녀석과 손을 잡고 춤을 추게 되었다. 처음 느껴보는 가까운 거리에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의도가 빤히 보이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적지 않았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선물을 준 사람이 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터였다. 네가 날 찬밥으로 대하고 있지만 난 이렇게 어른스럽다고. 나는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는 사람. 후후.


그 순간, 그 녀석이 어색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내 손을 놓았다.


"나 가야 돼."

그 녀석이 휭 돌아서서 가버렸다.


이유는 듣지 못했다. 주변에 둘씩 붙어있는 학생들이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중이었다. 그 안에 내가 나무 막대기처럼 서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춤추기에 여념이 없기를, 나를 보지 못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 겸연쩍은 상황에 놓인 나 자신을 애써 위로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날 사랑하지 않는 너를 사랑하는 일이란, 이유 없는 무안함과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 뒤로 그 녀석과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기억나는 게 없는 걸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나도 신경을 끊은 모양이다. 식사 시간에 마주 보고 앉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다. 미움조차 사라진 자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잘난 척 떠들어댔던 과거를 반성했다.


사랑에도 이유가 없듯, 미움에도 이유가 없었다. 날 사랑하지 않는 너를 사랑하느라 이유를 찾고 의미 없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삶은 쓸쓸하다. 그 고되고 소모적인 일을 견뎌내는 사람은 성인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범부중생이었다.


그저 날 사랑하는 널 사랑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덧)

흥! 나도 춤 추는거 별로 안좋아했다고.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의 학생으로 지내다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 남기는 중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