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아침을 : 모닝구를 찾아서
부지런히 눈이 떠졌다. 새벽녘 늦게 잠든 것이 기억나 눈을 뜨고서도 한참을 멀뚱 거리다 몸을 일으킨다. 창밖은 며칠이나 내린 비가 무색하게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6월 중순이지만 방심한 사이 불쑥 여름이 와버릴 것 같아 되려 으스스해지는 기분이다. 교토의 여름은 무덥기로 악명높고, 나는 아직 반론할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으니까.
간추려놓은 아침카페 목록을 살펴본다. 좋아하는 가게들을 저장해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는 것이 요즘 자주 하는 일중 하나인데, 오늘은 벌써 수년전에 부터 점찍어둔 곳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자전거로 딱 알맞은 거리다.
자전거를 타겠다고 마음먹고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수리가 너무 뜨거우면 얼른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길 작정이었다. 현관을 나서니 다행히 아직 한여름은 아니다. 약간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공기 덕분인지, 오래간만에 바른 선크림 덕분인지 이 정도면 자전거도 타기 영락없이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하우스 마키(coff houes maki)
커피 하우스 마키에 도착했다. 소박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생각보다 깔끔하고 넓은 현대식 킷사텐 느낌이 들었다. 매번 도로가의 낡은 간판만 구경하며 지나쳤는데, 뒤쪽문에서 살펴보니 작지만 멋스러운 2층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게다가 주차장도 있는 카페라니.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교토에서 주차장 딸린 개인가게를 찾는건 언제나 숨은그림 찾기같다.
낡은 간판에는 1963이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내 부모님이 태어날 무렵에 시작된 가게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달갑기도 하고 까마득히 멀게도 느껴진다. 실내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오래전부터 동네 사랑방역할을 해온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주문은 역시 모닝세트다. 이것을 맛보려고 온 거니까. 토스트세트보다 조금 비싼 시그니처 모닝세트를 주문했다.커피하우스 마키는 다양한 원두를 갖춘 핸드드립커피도 자랑이지만, 독특한 비주얼의 모닝세트도 인기다. 특별히 시간 때우러 가는 공간이 아니라면, 보통은 시그니쳐 메뉴를 주문하는 편인데, 특히 핸드드립 카페라면 그 가게만의 레시피인 블랜드커피를 맛보는 일도 꽤 재미있는 경험이 된다.
주문을 하고 둘러보니 먼 곳에서 나들이 온 것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들 무리와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남자들, 나처럼 혼자 않아 조용히 아침을 맞이하려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 것을 보면 이게 정말 동네 사랑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맛있는 블랜드커피와 아침세트를 든든하게 먹었다면, 본격적으로 아침 산책을 떠나볼 차례다. 마키가 위치한 곳은 데마치야나기라 불리는 지역이다. 여행자들에게는 청수사나 기온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느긋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스폿이다.
데마치 산책 出町さんぽ
산책을 떠나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아직 배가 꺼지지는 않았겠지만, 이곳에서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다. 이길을 지나면 나는 꼭들른다. 명실상부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데마치의 명물떡집, 데마치후타바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닫는 늦은 오후까지, 늘 구불구불한 줄을 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옆 가게에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니 종일 줄만 세워주는 사람이 있을 정도. 그중 가장 명물은 검은 콩이 쏙쏙 박힌 마메모찌(豆餅), 콩떡이다. 사실 교토에서 검은콩떡은 어느 떡집에 가든 볼 수 있고, 대형마트나 심지어 편의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간식이지만, 이왕이면 이곳에서 맛보시길. 흔한 찹쌀떡이라 시시하다고 생각할지 몰라 조금 걱정되지만, 꼭 마메모찌가 아니어도 계절 따라 선보이는 일본의 전통 떡들도 만날 수 있으니 즐겨보길 추천한다.
떡 사기에 성공했다면, 잠시 옆 골목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데마치마스타카(데마치 상점가)가 등장한다. 번화가의 상점가에 비하면 작지만 그만큼 한적하고 소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애니메이션 <타마코 마켓>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순례 명소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데마치자(Demachiza)가 보이는데, 48석 짜리 작은 극장이다. 굳이 간판을 찾지 않아도 '혹시?'하는 생각이 든다면 바로 그곳이다. 커피숍과 서점이 병설되어 있어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잠시 쉬어가기 좋다.
상점가를 둘러봤다면 이번엔 초여름을 한가득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찹쌀떡을 손에 쥐고 동쪽으로 조금만 방향을 틀어 걸으면 카모가와 델타에 도착한다. 카모가와는 교토를 관통하는 강의 이름인데, 북서쪽에서 흐르는 카모가와와 북동쪽에서 흐르는 타카노가와가 만나는 지점을 카모가와 델타라고 부른다. 한가로운 풍경도 아름답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쉬어가기 좋은스폿이다.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속 배경 장소로도 유명하다. 주인공인 타카토시와 에미는 카모가와에서 한때를 보내며 추억을 나누는데,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다 보면 징검다리 위에서 까르르 웃는 아이, 연인, 친구들이 주인공이 되어 어느새 영화 속 한 장면이 그대로 펼쳐진다.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며 조금 지루해질때 쯤,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10분쯤 걷다보면 다음 스폿이 기다리고 있다. 교토교엔과 도시샤대학이다. 도시샤대학은 교토교엔에 들르기 전, 가볍게 둘러보면 좋은 곳으로 추천하는데, 특히 한국인에게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개방시간 내 방문하면 한글로 쓰인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를 볼 수 있다. 이국의 대학풍경도 슬쩍 구경하는 것은 덤. (특히 윤동주의 시비는 교토 전체에 세 곳이 있는데, 여유가 된다면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행하는 것도 의미있게 느껴질 것이다) 과거에 핍박받던 한국인,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일본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마음이 찌릿해진다.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교토교엔을 향해보자. 교토교엔은 교토시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경복궁 면적의 2배 쯤 되는 크기인데, 과거 일본 천황의 황궁이었던 교토고쇼, 센토고쇼, 고미야고쇼를 둘러싸고 있다. 교토에서 도쿄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방치되었다가 현재의 공원으로 재정비되었다. 거대한 규모의 공원에 들어서면 순식간에 딴 세상에 온 느낌이 든다. 봄이면 1500그루 이상의 벚나무를, 가을에는 다양한 수종의 단풍이 물들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부담 없는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하릴없이 일상을 걷다보면 제대로 된 방향이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크게 마음먹고 나선 아침산책길이 불안을 잠재우는 힘을 주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느긋한 산책을 마음먹어보자. 초여름의 햇살이 더 강렬해 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