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아침 - 제철 단호박죽(2)

교토에서 아침을 : 홈메이드 모닝구

by 에트바스

다시 여름.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사는 집에는 냉장고가 없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지만, 겨우 냉장고 속 식재료를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서야 그 안에 든 것들을 부지런히 돌보지 않으면, 그게 뭐가 되었든 금방 맥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해 먹을 것처럼 신나는 마음에 사둔 싱싱한 채소와 생선들을 모른 척하던 날들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들시들한 식재료들을 요리하는 것도 음식물쓰레기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더 곤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찬거리를 살피다가 200엔짜리 단호박이 눈에 띄었다. 겨우 1/4인데 두 주먹보다 훨씬 큼지막한 단호박이었다. '특가품'이라고 붙은 글자들도 내 마음이 움직이는데 한 몫했지만, 여태 마음에 드는 단호박죽을 한 번도 못 먹은 것이 번뜩 생각났다. 곧장 150L가 채 안 되는, 작고 귀여운 우리 집 냉장고로 들였다.


그날부터 며칠은 내 위장이 말썽을 피우는 중이었다. 전쟁이 잦아느는 캄캄한 밤 10시. 드디어 단호박죽이 떠올랐다. 내일 아침이라면 나도 뭔가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그게 단호박죽이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호박을 꺼내 커다란 칼로 숭덩 잘랐다. 4 등분한 것이 이렇게도 큰데 원래는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며.


냄비에 불을 올리고 채반에 단호박을 얹었다. 단단한 단호박이 말캉하게 쪄지는 동안 새알심을 만들기로 했다. 과일찹쌀떡을 만들어먹고 남은 찹쌀가루가 아직 남아있었다. 새알심은 옹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옹심이건 새알심이건 누가 지은 것인지 이름이 참으로 앙증맞다. 새알심을 만드는 것은 태어나 첫 도전이다.


찹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졸졸 부어가며 엄지손톱크기만큼 떼어낸 반죽을 손바닥에 동글린다. 우동으로 유명한 일본 사누키현의 족타우동가게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사장님은 우동이 귀여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반죽을 밟아 만든다고. 새알심 너희들도 어여쁜 이름만큼 귀여워져라.


단단히 대기하고 있던 핸드블랜더로 말캉해진 단호박을 으깨 찹쌀가루와 섞어 냄비에 넣었다. 죽은 작고 얕은 불로 찬찬히 달래 가며 저어야 한다. 불이 세면 마그마처럼 냄비밖으로 튀어나가는 일은 예사다. 내가 먹는 것이 내 몸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더 정성스레 젓게 된다. 너무 빨리 뜨거워지지 않도록, 조금씩. 더 천천히.


아침에 신나게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아픈 것은 금세 잊고 당장 맛보지 않고는 배길수가 없어 얼른 한국자를 퍼냈다. 새알심도 잊지 않고 두 개. 갓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둔다는 건 아무래도 나에게도 음식에게도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고기에 간장을 부어두면 갈비가 되는 줄 알고 있던 시절을 지나(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였다) 단호박에 물을 넣고 휘휘 젓기만 하면 단호박죽이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을 또 지나, 이렇게 어엿한 단호박죽을, 새알심이 콩콩 박힌 멀쩡한 단호박죽을 만들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가끔은 어른이 된 것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다음 날. 냉장고에 넣어둔 단호박죽을 살짝 데우는데 어쩐지 만들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달콤한 군고구마 냄새가 났다. 단호박죽을 찬찬히 저을수록 검댕이가 묻어 나왔다. 아아..


일단 한 그릇 야무지게 먹고, 또 한 그릇을 퍼내려니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부분까지 싹싹 퍼내자 금빛 단호박죽에 짙은 갈색빛 검댕이가 가득이다. 어쩐지 이건 구운 단호박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태워먹은 남편에게 잔소리한 것이 살짝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고구마의 세계에서도 찐 고구마보다는 군고구마가 맛있긴 하니까.







<아침식사로 좋은 단호박죽 만드는 방법>


1. 단호박을 찐다. (찜기에 올리거나 전자레인지도 가능)

2. 찹쌀가루에 소금 한꼬집을 넣고 뜨거운 물을 졸졸 부어가며 반죽덩어리를 만든다.

3. 작게 동글리며 새알심을 만들고, 쪄진 단호박은 껍질을 까낸다.

4. 단호박은 물을 약간 넣어 블랜더로 으깨 섞는다. 찹쌀가루 흩뿌려 넣고 날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조금 더 섞어준다.

5. 냄비에 옮겨 담고 약한 불에서 저어가며 새알심이 익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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