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아침 - 제철 단호박죽 (1)

교토에서 아침을 : 홈메이드 모닝구

by 에트바스


아플 때마다 어떻게 하면 나아지게 되는지 분명히 알아서, 그렇게 하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호박죽을 만들면서 상상한다. 내일 아침 이 한 그릇이 급체로 나약해진 내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온 하루에 생기가 넘치게 될 거라고.


내일 아침은 단호박죽을 먹기로 정했다. 아침에는 바쁘기 마련이니 저녁에 채비해 두기로 했다. 제철음식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어느 때고 뭐든 찾아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어쩐지 제철에 나는 식재료들을 생각하면 힘이 나는 기분이 든다. 보드라운 단호박죽이라면 더없이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있다. 그중에는 죽을 만드는 일이 어지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도 포함될 것이다. 맞다. 죽은 만만치 않은 음식이다. 이상하게도 여름이 오면 꼭 한 번은 단호박죽이 먹고 싶어 몸이 닳게 되는데, 특히 믹서기 없이, 한 여름에 죽을 쒀야 할 때는 더욱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의 첫 단호박죽은 제주에서였다. 에어컨도 없는 구옥에서의 여름이었다. 그 여름, 동네 하나로 마트에는 늘 짙은 초록색 단호박이 넘쳐나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 주방다운 주방을 가지게 된 차였다. 그 부엌에서 나는 여간해서는 익지 않는 단호박과, 아니 단호박을 앞에 두고 나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냄비 뚜껑을 닫고 얌전히 기다리면 될 것을 싶지만, 그때는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부엌을 오가며 냄비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단호박이 말캉해지기를 기다리며 땀을 흘렸다. 단호박이 그리 딱딱한지도 몰랐던 시절이었으니, 일단 서너 등분 하는 데에만 한참을 진을 뺐고, 어렵게 자른 단호박은 내 마음도 모르고 그리 오래도록 익지 않고 있었다. 바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덜 익은 단호박을 으깨느라 세 번째 전쟁을 치르며, 입맛이 똑 떨어진 채로 뜨거운 단호박죽을 먹었다는 이야기.


* 부엌만 가졌지, 믹서기는커녕 채반도 전자레인지도 없던 때였다. 전자레인지에 익히면 빠르고 안전하게 익힐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몇 년이 흘렀을까. 일본에 도착해 맞는 첫 번째 여름이었다. 나는 또 단호박죽이 먹고 싶어 져 마트로 향했다. 지난 과오는 잊기 위해 채소코너를 모른척하며, 대신 가공식품 진열대를 둘러봤다. 이제 막 한글을 뗀 아이가 거리의 간판을 하나씩 읽는 것처럼, 더듬더듬 히라가나를 읽는다. 카보차(かぼちゃ) 발견! 바로 단호박이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처음으로 배운 단어였던 것이 기억나 두배로 반가웠다. 죽 대신 뜨거운 물을 타 먹는 인스턴트 수프였지만, 어쩐지 단호박죽의 맛과 같을 거라고 단정하며 카트에 담았다.


일본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말해두고 싶다. 마침 단호박죽을 먹고 싶다면, 일본에서는 좀 참는 게 낫다고. 내가 처음 맛본 그것은 수프를 가장한 단호박색 소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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