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철이 와서인지 골목길이 유난히 분주했다. 누군가의 손때 묻은 가구와 잡동사니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내가 사는 집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막 이사를 간 듯, 어수선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더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재빠르게 스무 권쯤 되는 책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책들은 초등학생이 읽는 그림책 같았다. 글씨는 큼직했고, 문장도 몇 줄 되지 않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유명한 외국 화가들이 한 권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낯익은 그림들 사이로, 잊고 지냈던 프랑스어 단어들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Lumière(빛)’, ‘Étoile(별)’, ‘Esprit(영혼)’.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철자들을 입안에서 굴리며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한동안 덮어두었던 그 언어는, 지금 화가들의 그림과 어우러져 캔버스 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모네의 출렁이는 빛의 물결, 르누아르의 웃음 가득한 무도회, 칸딘스키의 규칙적인 도형. 그림을 볼 때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작가들만의 고유한 개성이다. 그것은 언어를 배우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처음 프랑스어를 접했을 때, 나는 그 언어만이 지닌 독특한 존재감에 매료되었다.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들려오는 억양의 높낮이와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는 나의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나는 그 순수했던 마음을 깊숙이 밀어 넣은 채 꺼내보지 않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길가에 놓인 그림책은 나를 일깨워주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단어나 문법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을 때 넘치도록 가졌던 나의 호기심이었다. 그림 속 화가들이 붓끝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그려냈듯, 나 역시 그 언어와 함께 다시 일상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지금 내 품에 안긴 책의 무게가 너무나도 묵직하다. 어느 이름 모를 초등학생은 왜 이 책들을 이렇게 깨끗하게 내놓아 내가 갖고 가도록 만들었을까. 왜 하필 이 전집은 프랑스 작가가 집필해 프랑스어로 제목을 달고 있을까.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몇 줄 되지 않는 프랑스어 문장들이 마음속에서 돌덩이처럼 가라앉는다. 더 이상 화가의 그림은 보이지 않고, 프랑스어만이 또렷이 떠오른다.
오늘 나는 길 위의 도서관에서, 악마의 발톱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