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바다, 부레 없는 우리-마흔 넘은 사춘기>
일을 하는 과정에서 관리자가 되면 늘 갈등과 초조함을 느낀다. 특히 조직 정서와 조직원에 대한 판단과 태도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말을 할까? 말까? 나서야 하나? 잠자코 있어야 하나? 외면해야 하나? 책임져야 하나?
이런 질문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다. 올바른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 후에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일들에 대해 또 다른 결심과 책임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연속이다. 도대체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모든 판단과 결정 앞에는 타인을 어떤 존재로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빠른 사람인지 느린 사람인지, 책임감을 가진 사람인지 무책임한 사람인지 등의 판단을 통해 타인을 인식하고 언행을 결정한다. 부하직원은 물론 상급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결국 그 기준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속도와 타고남, 그간의 살아냄을 이해하고 난 후에 타인에 대한 비교 인식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험뿐이다. 감정의 바닥을 보는 경험은 참을 수 있는 일과 참을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타고남과 살아냄 대해서 가능한 많은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생물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기억 저편에 자리 잡은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불행의 가능성은 적어진다.
자기 자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다. 경험해 온 대부분의 일상이 그러했다. 내가 작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야 나보다 큰 사람을 볼 수 있었고 그가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손이 닿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감정의 바닥을 보고, 내 감정의 호불호를 깨달은 후에야, 타인의 말과 행동, 태도와 적개심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나온 이후 쌓아온 타고남과 살아옴에 대해 적어도 남보다는 조금 더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나에 대해 궁금해졌다. 이제야.
철교를 건너며
갇혀 있기에 고통받는 사람과
갇혀 있음을 모르기에 고통받지 않는 사람 사이에
부딪히지 못하는 갈등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내 삶에 아무것 하지 못하고
내 삶 또한 내게 아무것 하지 못하는
맴돌기만 하는 갈등이 있다.
철교를 건너며
나는 그 끝을 바라본다
끝을 향해 뛰어간다.
숨이 차올라 다리 난간에 기대어
갈등과 무능함에 돌질을 하다
그 때문에 내가 사랑할지 모르는
저 끝과 나 사이의 간격에 뛰어들어
끊임없이 그 사이를 무리수 등분하며
또다시
더딘 뜀박질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