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와이계곡 +α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주변에 등산 이야기를 하면 의외로 관심가지며 같이 가자는 경우가 많았다. 열렬한 러브콜을 받던 중, 한 명의 제안이 끌렸다. 같은 직장에 다니다가 퇴사한 전 동료이자 현재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언니 S였다. S는 한때 직업군인이었고, 그해 봄에 10km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한 체력을 지녔다. 운동을 쉰 지 오래되었다고 했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같이 가기로 정한 곳은 바로 도봉산. 그중에서도 와이계곡을 거치는 코스였다. 90도 가까이 되는 경사를 철근 구조물에 의존해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으로 도봉산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수락산, 북한산을 다니며 난간, 줄을 붙잡고 오르는 데 재미 들리기도 했고 어마무시한 경사를 보니 도전 정신이 불타올랐다. 혹시나 싶어 S에게 등산화 있는지 확인하고, 코스가 자세히 소개된 블로그 주소를 보내줬는데 괜찮다고 하길래 같이 가기로 했다.
등산 디데이가 되었고, 도봉산역에서 일일 등산메이트 S를 만났다. 그의 차림새를 보자마자 이 날 운동은 물 건너갔음을 예감했다. 전직 군인답게 KOREA ARMY가 쓰여있는 반팔티를 입고 온 S는 위풍당당해 보였지만 어깨엔 백팩이 아니라 귀여운 에코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코백에 뭐가 들었나 물어보니 해맑게 오이, 방울토마토, 수박 등 과일과 삶은 달걀을 싸왔다며, 물은 안 가져왔다고 하더라. 수박이나 오이가 수분 보충에 좋은 과일이긴 하지만 산행에서 물은 필수다. 특히 이때는 6월 말이었기에 더욱 중요했다. 혹시나 해서 생수 여유분을 들고 온 스스로를 속으로 칭찬하며 마음을 비웠다. 나중에 들었는데 S는 내가 참고하라고 보낸 블로그를 대충 봐서 와이계곡이 어떤 곳인지 몰랐고, 피크닉 정도로 생각하고 나왔다고 한다.
도봉산역에서 나오자마자 어마무시한 숫자의 러브버그를 목격했다. 23년부터 여름에 북한산에서 많이 출몰했다는 기사를 봤지만 실제론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올라가면서 다른 등산객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23년까지는 도봉산에서 조금 보이는 정도였지 이렇게 많지 않았다고 했다. 도봉산 등산로 초입부터는 바닥에 까만 무언가가 점처럼 다다다닥 있는 게 많이 보였다. 처음엔 버찌 비슷한 열매가 많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올라가면서 직감했다. 열매가 아니라 전부 등산객에게 밟힌 러브버그라는 사실을.. 등산로 입구에 진입하기 싫었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산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S가 조금만 쉬자고 했다. 천천히 오르며 속도 맞춰주고 있었는데 피크닉을 기대하고 나온 입장에선 힘들었나 보다. S의 눈동자는 점점 흐려졌고, 중간에 에코백을 뺏어서 내가 짐을 다 들고 가기도 했지만 중도하차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물 마시자, 사진 찍자며 한 번씩 숨 돌릴 틈을 주고 “벌써 절반가량 올랐어요, 힘내요”, “전직 대한민국 육군의 힘을 보여주세요!”, “여기만 지나면 경사 덜하니 조금만 더 가요”하며 응원했다.
대망의 와이계곡 도착. 코스 특성살 한 명씩 내려가야 해서 내가 먼저 내려갔다. 뒤를 보니 다른 등산객만 보이고 S는 보이지 않았다. 와이계곡은 주말엔 사람이 많아 위험할 수 있어 일방통행만 가능하기에 돌아갈 수 없었다. 난간을 잡고 있다면 전화를 받기 어려울 테니 연락할 상황도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다 서있을 만한 공간이 나올 때까지 가서 기다렸다.
한참 뒤에 S가 나타났다. 알고 보니 무서워서 못 내려가고 서있다가 우회로를 이용하려 했는데, 근처에 있던 어르신께서 할 수 있다고, 뒤에서 봐줄 테니 같이 내려가자고 용기를 북돋아주신 덕분에 왔다고 했다. 길을 마저 가는데 뒤에서 어떤 남성이 “이 계곡은 와이?! 왜?!!! 왜 올라가는 거야 왜?!! “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서 피식 웃었다.
와이계곡을 지난 S는 완전히 지쳐 보였다. S에게 용기를 준 어르신께 원래 가려던 하산코스가 어떤지 물어보니, 거리는 짧지만 좀 힘들 거라고 하셨다. S가 그 말에 식겁한 눈치길래 좀 길어도 완만한 코스를 물어봐서 그 길로 하산했다. 내려가서 카페로 향했고, 디저트를 먹는 S는 이 날 봤던 표정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이런저런 말을 하던 중,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S는 주변에 점점 결혼한 사람이 많아져서 미혼 친구가 귀하다고, 우리는 결혼하지 말자고 하더라. 난 애초에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 그러자고 했지만 그걸론 믿지 못하겠는지 농담반 진담반으로 혈서를 쓰자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빵 터졌고, 내가 웃든지 말든지 혈서로 혈맹을 맺자고 하는 S에게 “혈서보다 더 좋은 게 있어. 결혼하게 되거든 와이계곡을 또 가는 거 어때? 일명 ‘와이계곡 동맹’이지 “라고 했다. 그러자 혈서 얘기는 쏙 들어갔고, 그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곧 비장한 표정으로 좋다고 했다. 이날 이후로 S는 나와 다시는 등산을 안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어느 산이 초보 난이도라는 이야기를 하면 의심하고 안 믿는다. 그래서인지 S는 지금도 미혼이다. 나는 나중에 와이계곡을 혼자 또 갔지만 미혼이다. ‘와이계곡 동맹은’ 혈맹보다 더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S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원래는 하산 후 혼자 북한산 백운대 최단코스를 가려했으나, 러브버그에 너무 시달려서 포기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내내 이대로 집에 가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팡질팡 하다가 충동적으로 사당역에서 내려 관악산으로 향했다.
도봉산을 쉬엄쉬엄 올라가고, 카페에서 좀 쉬었다지만 초보자에게 1일 2산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음날 비가 예정되어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고 흐려서 덜 힘들었다. 서울대 공대로 하산 후 집으로 향하는 길은 피곤했지만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