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보낸 365일

미국 주재원 와이프 생활 1년, 멈춰 있지 않았던 시간

by 적응형이방인
새벽 5시 반, 알람이 울린다.
해가 뜨기도 전인 창밖은 아직 새카맣다.
조용히 세수를 하고 주방의 불을 켜는 것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싸고, 잠투정하는 아이들을 달래 깨워 밥을 먹인다.
두 아이의 등교를 마친 후에는 생존을 위한 운동을 하고,
컬리지에 가서 수업을 듣거나 영어를 공부한다.
오후가 되면 다시 밀린 집안일과 아이들의 라이딩,
방과 후 활동과 숙제, 한글을 가르친다.
저녁을 먹이고 아이들을 재우고 난 밤 9시.
나는 비로소 책상에 앉아 밤늦게까지 홀로 글을 쓴다.


미국에서 이 생활을 이어간 지가 벌써 딱 만 1년이다.

평범하고 별것 아닌 일들로 가득 채워진 하루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 가족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와 환경 속에서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영어 한마디 못해 눈치로 버티던 아이들이 이제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학교생활을 이어간다.


6개월 가까이 매일 울며 유치원 문을 넘던 둘째가 어느 날 웃으며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이 아이도 이제 이곳에 마음을 붙였구나' 싶어서.


남편 역시 치열한 업무와 낯선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 중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기회들을 배워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그저 모두가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 편의 조급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쌓아온 내 커리어에 대한 미련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기획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한국의 치열한 사회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이 시간이 '경험'이 아니라 '공백'으로 남을까 두려웠다.



넓은 하늘과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 조금 느리게 흐르는 일상. 모든 것이 평온했지만 이 삶이 완전히 내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정착한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히 긴장을 내려놓지 못한 채, 어딘가 중간 지점에 서 있는 기분으로 지난 일 년을 살았다.



이곳의 낯선 문화는 이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한 고민은 언어다.

가끔은 그냥 포기하고 적당히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갈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미련을 놓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사람들과 깊이 교감하고, 이 사회에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보고 싶다.


영어는 참 어렵다. 어떤 날은 술술 말이 나오다가도, 다음 날이면 간단한 문장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매일이 분주한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나를 힘들게 했다.

눈으로 보이는 실적도, 진급도, 피드백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낼 뿐이다.




며칠 전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언제쯤 영어를 잘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여기 와서 1년 동안 이룬 게 없는 것 같아 조급한 마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처음 미국 왔을 때 기억나?
주문도 못 해서 내가 다 했잖아.
지금 충분히 많이 늘었어.
그리고 1년 전 아무것도 없던 이곳에서
우리 가족의 하루를 만들어낸 건 당신이야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면 나는 완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 낯선 곳에서 오직 나의 힘으로 가정을 지켜냈고,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와 문화 속에서 꿋꿋이 자라났으며,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곳의 삶을 배워가고 있다. 그거로 충분하다.



지난 1년은 멈춰 있던 시간이 아니라,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덜 서두르기로 했다.


지금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은 나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미국에서의 5년이란 시간을 모두 보낸 뒤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계속해서 걸어가고는 있을 것이다.


Trust your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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