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노 합리적 소비.

런닝화 쇼핑하는 법 ?

by 밀잠자리


12월의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오면 캘리포니아의 러너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추위를 뚫고 어떻게든 마일리지를 채우려는 독한 부류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내년 시즌을 기약하며 동면을 준비하는 부류. 하지만 이 두 부류가 대동단결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가 있으니 바로 연말 세일 시즌이다. 바야흐로 쇼핑의 계절이다. 일 년 동안 묵묵히 달린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도파민에 중독된 소비 요정들이 날개 짓을 하는 시기다. 러너들의 심박수는 주로가 아닌 모니터 앞에서 빨라지기 시작한다. 주요 스포츠 브랜드들이 매일 세일 품목을 업데이트 하고 있어, 러너들은 매의 눈으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눈치 게임을 시작한다. 이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자 승부다.


타깃은 명확하다. 평소 정가 주고 사기엔 손이 떨렸던 최상급 카본 플레이트 레이싱화 혹은 내 발에 검증된 든든한 쿠션화. 우리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가격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하이에나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디자인은 남들 눈에도 예쁜 법이고 내 발 사이즈인 270밀리미터나 275밀리미터 같은 황금 사이즈는 순식간에 품절이라는 비정한 빨간 딱지가 붙는다.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재고 없어질 때의 그 쫄깃한 긴장감은 마라톤 출발 전의 긴장감 못지않다. 결국 전쟁터에 남는 건 무엇인가. 290밀리미터 이상의 항공모함 같은 왕발 사이즈거나 디자이너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운 난해한 컬러 조합뿐이다. 형광 핑크와 칙칙한 색이 섞여 있거나 멀리서 보면 방사능 폐기물처럼 빛나는 라임색 같은 것들 말이다. 정상적인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돈을 주고 사라고 해도 거절할 물건들이다. 하지만 할인율이 40퍼센트 50퍼센트를 넘어가면 우리는 타협의 귀재가 된다. 뇌의 회로가 순식간에 경제성 논리로 재배선된다. 색상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달리면 흙먼지 묻을 텐데. 그리고 밤에 달릴 땐 눈에 잘 띄니까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이건 패션 테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야. 신발은 어차피 소모품이잖아. 그렇게 나는 청개구리 같은 형광 초록색 신발을 반값에 결제하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택배 상자를 보고 또 이상한 거 샀어 라고 핀잔을 줄 게 뻔하지만 나는 꿋꿋하다. 이건 1km당 비용으로 환산하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거야. 기적의 논리 앞에서는 그 어떤 잔소리도 무력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딜레마가 생긴다. 단순히 색상이 마음에 안 드는 문제를 넘어 브랜드 자체를 갈아타야 하는 순간이 올 때다. 세일 폭이 크다는 이유로 혹은 내 사이즈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평소 신던 브랜드가 아닌 낯선 녀석을 덜컥 입양해도 될까. 예를 들어 평소 나이키나 아디다스만 신던 내가 할인율에 눈이 멀어 써코니나 호카 같은 브랜드의 신발을 사도 되는 것일까.


보수적인 러너들은 말한다. 구관이 명관이다. 함부로 신발 바꾸면 다친다. 맞는 말이다. 자동차로 치면 서스펜션의 세팅이 완전히 바뀌는 것과 같다. 브랜드마다 추구하는 오프셋 즉 힐 드롭의 높이가 다르고 미드솔 쿠션의 물성이 다르고 발볼을 감싸는 토박스의 모양이 다르다. 내 몸의 관절과 인대는 기존 신발의 역학적 구조에 맞춰 최적화되어 있는데 갑자기 낯선 환경이 주어지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아킬레스건이 비명을 지르고 얌전하던 족저근막이 궁시렁댈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다. 부상은 러너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기에 이 조언은 뼈아프다.


하지만 나는 이 시점에서 조심스럽게 합리적 외도를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익숙함이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기술력이 집약된 훌륭한 러닝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가를 다 주고 모험을 하기엔 우리 지갑이 너무 얇지 않은가. 20만 원이 훌쩍 넘는 최신상 러닝화를 큰맘 먹고 샀다고 치자. 그런데 막상 신어보니 발볼이 너무 좁거나 힐컵이 뒤꿈치를 갉아먹는다면 어떨까. 몇 번 신지도 못하고 신발장 구석의 값비싼 장식품으로 전락시켰을 때의 그 쓰라림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돈이면 뜨끈한 국밥이 몇 그릇이며 아이들 치킨이 몇 마리인가.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자괴감이 더 크다.


그렇기에 세일 기간이야말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날 절호의 기회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확장할 수 있는 타이밍인 것이다. 평소 러닝 커뮤니티에서 좋다는 소문은 무성하지만 내 발엔 어떨지 몰라 망설였던 그 모델. 매장에서 잠깐 신어보고 제자리 뛰기 몇 번 한 걸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진짜 궁합을 필드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러닝화의 진가는 매장의 카펫 위가 아니라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최소 10km 이상을 달리고 땀에 젖고 발이 부어오를 때까지 혹사시켜 봐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니까.


물론 위험 부담은 있다. 하지만 40퍼센트 50퍼센트 할인된 가격이라면 그 리스크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연구 개발 비용이다. 만약 운 좋게 그 낯선 녀석이 내 발에 착 감기는 인생 신발이었다면 나는 평생을 함께할 소울메이트를 헐값에 얻은 셈이다. 로또 당첨과 다를 바 없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정가 주고 샀을 때보단 정신적 데미지가 덜하다. 쿨하게 인정하면 된다. 아 이 브랜드는 나랑 안 맞는구나. 비싼 수업료 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신발은 동네 마실용이나 헬스장 웨이트 트레이닝용으로 강등시키면 그만이다. 혹은 깨끗하게 세탁해서 당근마켓에 올리면 치킨 값 정도는 회수할 수 있다. 다만 이 모험을 떠날 때 몇 가지 안전장치는 필요하다. 엔지니어링에서도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할 때는 기존 시스템과의 호환성을 따지지 않는가. 기존에 신던 신발의 스펙과 너무 극단적으로 다른 모델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10mm 드롭이 있는 신발만 신던 사람이 갑자기 제로 드롭 신발을 신으면 아킬레스건이 놀랄 수밖에 없다. 쿠션이 빵빵한 맥스 쿠셔닝화만 신던 사람이 바닥이 얇은 레이싱화를 신으면 정강이뼈에 무리가 간다. 변화를 주더라도 허용 오차 범위 내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새 신발을 신고 처음부터 장거리를 뛰는 만용은 부리지 말자. 아무리 좋은 신발이라도 길들이기 과정은 필수다. 짧은 조깅부터 시작해 내 발과 신발이 서로를 탐색할 시간을 줘야 한다. 일종의 썸 타는 기간이 필요하달까. 신발의 인솔이 내 발바닥 모양에 맞춰지고 갑피가 내 발볼에 맞게 늘어나는 물리적인 시간. 그리고 내 뇌가 새로운 착지 감각에 적응하는 신경학적인 시간. 이 시간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외도는 파국 즉 부상으로 끝난다.


아뭏튼 연말 세일이라는 이 달콤한 유혹 앞에서 나는 기꺼이 줏대 없는 박쥐가 되기를 자처한다. 나이키 파였다가 아디다스 파였다가 세일만 하면 호카 파가 되기도 한다. 이 브랜드 저 브랜드 기웃거리며 시도해 보는 것. 그러다 실패하면 툴툴 털고 일어나고 성공하면 유레카를 외치는 것. 이 또한 달리기라는 거대한 여정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장비질도 러닝의 일부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가 두려워진다. 먹던 것만 먹고 가던 길만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발에 익은 신발만 고집하다 보면 발전이 없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소재 새로운 설계가 주는 자극은 우리의 달리기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때로는 낯선 신발이 교정해주지 못했던 나의 안 좋은 러닝 습관을 고쳐주기도 하고 지루했던 러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장바구니에 담자. 결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망설임을 거두고. 형광 개구리 색이면 어떻고 남들이 잘 안 신는 비주류 브랜드면 어떤가. 내가 신어서 편하고 내가 신어서 빠르면 그게 명품이다. 어쩌면 그 택배 박스 안에 당신의 기록을 단축해 줄 날개 달린 헤르메스의 신발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 튀는 형광색 신발 덕분에 밤길 러닝에서 자동차가 나를 피해 가고 마라톤 대회 사진에서 내 모습이 기가 막히게 잘 나올지. 인생도 러닝도 그리고 쇼핑도 가끔은 지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실패하면 반품 배송비만 내면 된다. 그 정도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오늘 밤도 나는 모니터 앞에서 눈을 번뜩인다. 내 발에 꼭 맞는 신발를 찾기 위해서. 제발 내 사이즈 하나만 남아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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