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라는 출판사에서 2004년에 출간한 책으로 하드커버에 긴 판형을 가진 150여 페이지의 얇은 책인데 단색으로 Marks & Co.라는 상점 사진이 인쇄된 표지가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제 눈길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책은 미국의 헬렌 한프라는 여류 작가와 영국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서점 직원인 프랭크 도엘,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놓은 서간집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 1949년에 시작해서 프랭크 도엘이 1968년 12월 갑작스런 병고로 사망하고 서점 직원이 그의 죽음을 이듬해 1월 알려주고, 프랭크 도엘의 부인인 노라가 마지막 인사 편지를 보내는 1969년 초까지 장장 20여 년간 이어진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편지는 며칠이나 뜸하게는 몇 달이 지나서 답장이 오고 가며 그렇게 20여 년을 이어지며 이루는 전체 서사가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삶을 이어가는 등장인물의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프랭크 도엘은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서점에서 40여 년간을 근속하며 전후 경제가 어려운 런던에서 아내와 함께 두 딸을 키우는 모범적인 가장입니다.
헬렌 한프는 미국인으로 시나리오와 칼럼 등 매체에 기고하는 글로 생활을 하는 무명작가지만 쾌활하고 위트와 독설이 섞여있는 자존감 강한 여성입니다.
무엇보다 지적 욕구를 충족할만한 고서들을 값싸게 구입하고자 대륙을 건너 영국의 서점에 편지로 당찬 요구를 하는 의지 있고 직설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책을 구하고 송금하고 다시 요청한 고서를 보내고 하는 정성이 인연으로 이어지며, 차츰 서로의 생활과 주변 인물들과도 친숙한 인연을 이어가는 두 사람의 편지를 읽으며, 예전 생면부지 해외의 친구들을 이어주던 펜팔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며 SNS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손쉬운 매개체로 익숙해졌지만, 한자 한자 손수 적은 편지를 우체국에 가서 다닥다닥 우표를 붙여 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예전에도 사람들 간 네트워킹은 갈망의 대상이었던 듯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배급제가 실시되는 궁핍한 런던의 상황에서, 헬렌은 다른 유럽의 나라에 주문한 햄과 날계란 등을 보내주기도 합니다.
런던은 수놓은 린넨(테이블보)을 보답으로 보내주기도 하죠.
책만 오가던 사이에서 서로의 삶을 보다듬는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하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습니다.
영문 제목은 책과 같은 '84, Charing cross road'입니다.
영화 포스터 이미지
1987년 제작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양들의 침묵(91년)으로 대스타가 된 안소니 홉킨스가 프랭크 도일 역의 주연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헬렌 한프 역은 영화 졸업(67년)에서 로빈슨 역을 맡아 잘 알려졌던 앤 밴크로프트가 맡아 열연을 합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프트
영화는 책의 서간문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는 구성으로 표현이나 편지의 내용은 충실히 책의 그것을 따르지만, 간간이 추가되는 부연 영상들이 살을 붙여나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책으로 볼 때에는 상상의 영역이었던 서점 내부와 직원들의 복장과 말투, 그리고 런던의 당시 상황을 그려주는 생생한 영상은 영화의 장점을 더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타닥타닥 소리는 내며 타자기로 헬렌이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지금처럼 쉽게 쓰고 수정하고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 한자 활자화되는 타자기의 묘한 매력을 보며, 왠지 집에 타자기 하나사놓고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립니다.
실제 헬렌 한프는 대부분의 작가로서의 경력을 통해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었지만, 이 서간문을 묶어 1970년 출간하면서 히트작을 남기는 인기 작가가 됩니다.
이 아련한 스토리는 이후 영화와 연극 등으로 각색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헬렌 한프는 1997년 작고하기 전까지 자신이 출간한 이 책의 독자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독자들과의 인연을 편지로 이어가는 것으로, 죽은 프랭크 도엘에 대한 경의를 표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두 명의 주인공들이 생전에 서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설정도 특이하지만, 그럼에도 20여 년을 편지로 맺어진 우정으로 이어간다는 실화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007 시리즈의 M으로 잘 알려진 배우 주디 덴치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저는 워낙 다른 스타일로 나와 첫 등장에서는 못 알아보고 지나쳤었습니다.
007시리즈 중 M으로 연기한 주디 덴치
그리고 영화와 관련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의 제목 작명 센스입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프트 주연의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 어처구니없게도 '84번가의 극비문서'(비디오), '84번가의 연인'(영화)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영화 소개 이미지
'극비문서'라는 단어는 뭔가 첩보 영화를 떠올리는 어이없는 설정이고, 연인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를 크게 호도하는 잘못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84는 번지수이기 때문에 84번가로 표시하는 것 자체도 오류겠지요. (거리 이름은 채링크로스)
비디오 표지 이미지
그냥 책 제목과 같이 '채링크로스 84번지' 혹은 '채링크로스가 84번지'로 자연스럽게 정하면 될 것을 상업적인 과욕이 낳은 난센스라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가을입니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의 책을 먼저 읽어보고,
뒤이어 영화를 찾아보면(영화는 여전히 84번가의 연인으로 찾으셔야 합니다.) 차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지금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아가도 Marks&co. 서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폐업한 자리에는 지금 맥도날드가 성업 중입니다. 아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