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의 깊은 수표(水標) 아래 잠긴 시각
나는 홀로 어둠의 막을 들치고 나섭니다.
밤새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지상에 부려놓은
저 고요하고 눈부신 결빙의 위로들.
아무도 딛지 않은
설원(雪原)은 신이
밤새 나를 위해 펼쳐둔 깨끗한 수의(壽衣) 같아
그 위에 첫발을 내딛는 일은
차마 경건하기까지 한
아침의 예배입니다.
뽀득, 정적을 깨는 나의 발소리가
오늘을 살아낼 누군가의 맥박 소리 같아
나는 멈춰 서서
시린 손바닥에
하얀 평화 한 조각을 가만히 받들어 봅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힐 때마다
오히려 뜨겁게 차오르는 삶에 대한 경외(敬畏).
남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길목에서
나는 누군가의 생(生)을 지키러 가는 이 길 위,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배웁니다.
내 신발 밑창에 묻어온
이 순결한 빛들이
병실의 창백한 그늘을 환히 비출 수 있기를.
나의 수고로움이 누군가의 안녕이 된다면
이 시린 새벽은 더는 고독이 아니라
나에게 허락된 가장 찬란한 축복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길을 걷게 하심에.
고맙습니다,
여전히 지켜낼 온기가 내게 남아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