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2. 그림자 연인 (하)

[CASE 2] 그림자 연인 (하)

by 장경장

CASE 2. 그림자 연인 (하)


​쿵!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두 발이 착지함과 동시에, 코끝을 마비시킬 듯 지독하고 작위적인 장미 향기가 훅 끼쳐왔다.


​"…여긴."


​관자놀이를 후벼 파는 듯한 이명과 구역질을 참아내며 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희엄마 무의식에서 마주했던 축축하고 어두운 반지하 방과는 차원이 다른 공간이었다.


웅이 서 있는 곳은 시야가 멀 정도로 눈부신 조명이 쏟아지는, 온통 순백의 생화로 장식된 압도적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웨딩홀이었다.


​공간 전체에 귀를 간지럽히는 로맨틱한 웨딩 마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결점 없이 아름다운 공간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짙은 위화감을 뿜어냈다.
​웅의 시선이 화려한 샹들리에를 지나 웨딩홀의 벽면으로 향했다.


그것은 벽지가 아니었다.

수천, 아니 수만 장에 달하는 유명 *튜브 스트리머 윤지수의 사진들이었다.


라이브 방송 화면을 캡처한 채 환하게 웃는 사진, 길을 걷다 찍힌 듯 렌즈가 흔들린 사진, 누군가 등 뒤에서 몰래 찍은 듯한 아파트 현관에서의 흐릿한 뒷모습까지.


수만 명의 윤지수가 벽면에 박제된 채, 웨딩홀 중앙을 향해 섬뜩할 만큼 획일화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은 김태호의 뇌 속.

닿을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지독한 갈망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축조해 낸,

소름 돋도록 달콤한 망상의 성전이었다.


​웅은 숨을 죽인 채 웨딩홀의 붉은 카펫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꽃향기에 섞여 묘하게 비릿한 쇠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빈틈없는 로맨스의 전당 구석.
화려한 예식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하고 새까만 철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냉기와 함께, 수십 대의 서버 냉각 팬이 돌아가는 위잉거리는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저기다.'


​망상과 기술이 결합된, 저 남자의 가장 내밀하고 추악한 진실이 도사린 곳.
웅이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어두운 철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웅의 두 눈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창문 하나 없는 좁고 차가운 서버실.

그 안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수십 대의 모니터가 창백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화면마다 윤지수의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이 분석되고 있었고, 그녀의 자택 근처 교차로 방범 CCTV 영상이 쉼 없이 돌아갔다.


가장 중앙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에는,

배달 앱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 알아낸 윤지수의 자택 주소와 현관문 비밀번호가 마치 피로 쓴 것처럼 붉은 코드로 점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니터들 앞, 차가운 서버랙 구석에 한 소년이 처박히듯 웅크려 있었다.


현실에서 훈장이라도 받은 양 당당하게 헛소리를 지껄이던 32살의 김태호가 아니었다. 사랑받지 못해 지독한 애정 결핍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뼈만 남은 앙상하고 비참한 모습의 내면 자아였다.


​한태호는 모니터 속 윤지수의 사진을 끌어안고 짐승이 앓는 소리를 내며 헐떡였다.


​ "지수 씨가… 지수 씨가 날 불렀어.

하지만 난 갈 수 없어. 저기엔 그 쓰레기 같은 놈이 지수 씨를 억압하고 있으니까…

난 무서워. 난 영웅이 아니야…."


​현실의 당당함은 철저한 기만이었다.

그의 무의식 밑바닥에는 닿을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울부짖는 나약하고 궁색한 겁쟁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웅이 그 추레한 진실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딸깍, 챙—


​서버실의 무거운 공기를 찢고,

전혀 예상치 못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웅의 심장이 흉곽을 부수고 나올 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지포 라이터의 뚜껑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처량하게 우는 소년의 등 뒤, 모니터의 푸른 불빛조차 닿지 않는 서버실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짙은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형체가 소년의 귓가로 천천히 다가가, 뱀처럼 교활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울고 있어? 그녀가 오늘 방송에서 파란색 셔츠를 입었잖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

널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 용기를 내서 그녀의 방해물을 치워버려.

넌 그녀의 완벽한 영웅이 될 수 있어."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방어벽이 무너진 약자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어, 병적인 집착을 숭고한 구원으로 탈바꿈시키는 거짓된 해답.


​오염된 구원을 받은 소년의 눈물이 멈추더니, 입가에 섬뜩한 호선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웅은 혼란과 경악 속에서 야수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그림자를 향해 몸을 던지려 했지만, 20년 전의 잔혹한 트라우마가 온몸의 신경을 마비시킨 듯 발끝 하나 뗄 수 없었다.


​어둠 속으로 녹아들던 형체가,

기이한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휘— 휘— 휘익—


​"아아아악!!"


​웅의 비명과 함께 서버실의 모니터들이 파직거리는 굉음을 내며 일제히 터져 나갔다. 붉은 코드가 피처럼 쏟아져 내렸고, 화려했던 웨딩홀의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며 웅의 시야를 캄캄한 심연 속으로 끌어내렸다.


​"…그래서, 오직 저한테만 절박하게

신호를 보낸 거라고요!"


​시야가 번쩍, 하며 돌아왔다.
형광등의 파열음과 함께 정지했던 취조실의 시간이 다시 쏜살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허공에 멈춰있던 태호의 침방울이 책상 위로 떨어졌고, 태호는 여전히 두 눈을 번쩍이며 자신의 숭고한 기사도를 떠벌리고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겪었던 그 영겁 같던 시간은, 현실에서는 고작 3초에 불과했다.


​"하아, 하아…."


​웅이 다이어리를 덮어 쥐고 있던 손을 거칠게 빼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툭, 투둑.


웅의 코끝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려 철제 책상 위로 붉게 번졌다. 뇌를 무리하게 사용한 다이빙의 부작용이었다.


​웅이 손등으로 거칠게 코피를 닦아내며 혼란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뭐지? 대체 왜 저 새끼 머릿속에서

또 그 소리가….'


​이번엔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라이터를 튕기며 태호에게

속삭이던 그 일렁이는 실루엣.


내 처참한 트라우마가 남의 무의식 속에 환영을 만들어낸 걸까? 아니면… 20년 전 내 삶을 박살 냈던 그 놈이, 실제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던 건가?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희 엄마, 그리고 눈앞의 에로토마니아 환자까지. 범행 수법도 동기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뇌 속에서 동일한 시그니처가 존재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오싹한 가설이 웅의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핏자국을 닦아내는

웅을 바라보았다.


​"형사님? 제 진심을 읽으신 겁니까?"


​웅이 핏자국이 번진 소매로 입가를 문지르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눈빛은 당혹감을 애써 억누른 채, 먹잇감을 노려보는 포식자처럼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태호. 넌 기사도 아니고, 윤지수 씨의 영웅도 아니야. 그저 병적인 망상에 빠진 스토커일 뿐이지."


​갑작스러운 조롱에 태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지수 씨가 방송에서 파란 옷을 입고 저한테…!"


"파란색 셔츠가 구조 요청이다? 그럼 네가 그 남자를 찔렀을 때, 윤지수 씨가 비명을 지르며 널 경찰에 신고한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웅의 정곡을 찌르는 반박에 태호가 수갑 찬 손을 바들바들 떨며 악을 썼다.


​"그, 그건… 그 자식이 옆에서 지수 씨를 억압하고 있었으니까! 날 시험한 겁니다! 진정한 영웅인지 확인하려고 억지로 연기한 거라고요!"


​에로토마니아 환자 특유의 방어 기제였다.

현실의 거절이나 모순조차 상대방의

'은밀한 테스트'나 '외부의 억압'으로 기형적으로 합리화해 버리는 증상.


​웅이 조소를 흘렸다.


​"아니. 넌 그저 두려웠던 거야.

네 망상이 헛소리라는 걸 네 뇌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어두컴컴한 서버실 구석에 처박혀서 패잔병처럼 웅크려 울고 있었지. 누군가 네 알량한 망상에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던져주길 바라면서."


​쾅!


웅이 주먹으로 피 묻은 책상을 내리치자,

취조실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 네 귓가에 대고 라이터 튕기면서

속삭인 그 목소리."


​태호의 쉴 새 없이 떠들던 입술이 멈칫했다.


​"네 스스로 낸 용기가 아니잖아. 넌 나약하고 찌질한 놈이니까. 네 머릿속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 형체가 시킨 거잖아. 방해물만 치우면 네가 완벽한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안 그래?!"


​태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맹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자신의 위대한 기사도가 사실은 정체불명의 속삭임에 놀아난 결과일 뿐이라는 뼈아픈 진실. 난공불락 같던 에로토마니아의 견고한 망상 벽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웅은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반응했다.'


환영이 아니었다. 이 미치광이의 머릿속에 기어들어가 라이터를 튕긴 그 그림자가 허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자신이 주체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속삭임에 휘둘린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에 벌거벗겨진 태호는,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취조실 바닥에 처박혀 절규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내가 구한 거야! 지수 씨가 날 불렀다고!! 내가 스스로 한 거야!! 으아아아악!!"


​망상이 깨진 환자의 처절한 비명을 내려다보며, 웅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 머릿속을 망가뜨린 놈의 흔적이 환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직감.

웅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지독한 사냥꾼의 본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