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수 없는 약속

by Stella

“굳게 약속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이,

당신도 있나요?”


지켜주고 싶었는데, 지켜내지 못했다.

말은 쉬웠고, 현실은 잔인했다.

약속은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야 알았다.















지킬 수 없는 약속





“곧 나을 거야.” “아니, 우린 끝까지 함께야.”

그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수없이 되뇌었다.



중환자실에서의 시간이 꽤 흘렀다는 증거처럼,

엄마의 손톱과 발톱은 많이 자라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조심스레 엄지손톱 하나를 자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엄마가 움찔하며 손을 피했다.


“아파…”


정확히는,

정말 아파서라기보다는 무언가 겁이 났던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손톱을 자를 수 없었고,

자라나는 손톱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혹시 엄마가 괜찮다고 하면

언제든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늘 바지 뒷주머니에 작은 손톱깎이를 넣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손발톱이 신기하게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늘 지저분하게 뻗쳐 있던 머리카락도

누군가의 손을 거쳐 정성스럽게 두 갈래로 묶여 있었다.


중환자실 문을 열자마자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문을 열고 웃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기계 숫자부터 먼저 확인했을 것이다.

산소포화도, 폐에 들어가는 압력 수치,

엄마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수많은 숫자.


하지만 그날은—

그 숫자들보다 먼저 엄마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묶인, 삐삐 머리.


기계 소리로 가득한 병실 한가운데서

그 머리 하나가 참 이상하게도,

유일하게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 줬다.


그 순간, 뭔가가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잠깐이라도 안심할 수 있었던…

그런 감정.


면회 시간마다 나는

엄마의 손과 발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엄마, 내 말 들리지?” 그러고는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담당 교수님의 회진이 올 때까지—


어쩌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노력 같았다.


엄마가 듣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매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말들을,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눈이 살짝 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엄마는 말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입 모양을 읽고,

눈빛을 읽고, 몇 번이고 되묻고, 또 되묻으며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 나, 집에 언제 가?”

그 한마디에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곧 갈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엄마 데리고 갈게. 엄마, 약속해.”

그건,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건 엄마를 위한 말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을 붙들기 위한 작은 주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세상 가장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조용히 격려해 주었다.


“잘했어, 스텔라. 정말 잘했어.”

“… 내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그건, 그때가 되어봐야 알겠지.

지켜졌을 수도 있고, 끝내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그때 나는 꼭 말해줄 거야.

‘너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

‘지키려 했던 그 마음 하나면, 그걸로도 충분해.’라고.”


눈물이 또 왈칵 쏟아지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귀여운 삐삐 머리를 바라보며,

눈에 살짝 고인 눈물 사이로 나는 조용히,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믿기로 했다.

믿지 않으면, 그 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니까.


…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담당 교수님이 말을 꺼냈다.


“이제 더 이상

병원에서 해드릴 수 있는 치료는 없습니다.”


그 말은 곧, ‘전원(轉院)’을 의미했다.


엄마를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

그리고 나는, 또다시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번엔 ‘어디로 옮길 것인가.’


전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환자에게는 큰 스트레스였고, 그 병원이 어디냐에 따라

엄마의 생사까지 달라질 수 있는 무거운 선택이었다.


한 병원, 또 다른 병원.


재활과 호흡 치료의 수준,

거리와 위험성, 면회 가능 여부까지—


나는 모든 걸 계산하고,

또 계산하고, 고민하고, 결정을 했다가

다시 번복하기를 수차례.

그 어떤 결정을 내려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왜 모든 결정은 항상 나를 통해 내려지는 걸까.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앞에서

이토록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그 질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어떤 목소리가 나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잖아.

뭐든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자.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그 짐, 나에게 조금은… 내려놔도 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나, 사실… 그 말을 애타게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

‘넌 혼자가 아냐. 우리, 뭐든 함께 해보자.’

그 한마디를… 말이야.”


“… 그래. 근데 이건, 진짜야.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날 믿어도 돼.

‘우리’를 믿어도 돼. 우리, 뭐든 함께 해보자.”


차분했지만 굉장히 따뜻한 목소리였다.

작은 희망과 기쁨이 마음 한구석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약속을 떠올렸다.


“곧 집에 갈 거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결정하고, 움직이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나의 슬픔을 함께 견뎌주고, 내 마음을 감싸주던 존재.


그 목소리가, 이제는 내 곁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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