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안에 숨겨 둔 이름

by 선비천사

샛문은 안에서 잠겼다.
나는 바깥에서 자랐다.


문살 사이로
저녁이 잘게 부서져 흘러나오던 날,
누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울음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어깨 위로 저녁빛이 오래 머물렀다.


버들잎이 흔들린 게 아니다.
마른 숨이,
자꾸만 돌아섰을 뿐이다.


텃밭 덤불 속
붉은 것들이 숨어 있었다.
누나는 그것을 따서
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속이 빈 열매.

안쪽은 가볍고
겉은 투명하게 얇은 것.


“불어 봐.”


나는 힘껏 불었다.
붉은 막이 팽팽히 떨리다
작은 심장처럼 뛰다가
툭,
터졌다.


그 소리 뒤에
누나는 장독 뒤로 사라졌다.
웃음인지
금이 가는 소리인지
나는 끝내 배우지 못했다.


깡통치마 가장자리에
저녁이 묻어 있었고
삼단머리는
밤이 되어서야 풀렸다.


나는 ‘언니’라 부르지 못해
그 이름을 두 번 접어
입 안에 넣고 삼켰다.
누나.
누나.


밤마다
베개 속에서
붉은 것들이 조용히 터졌다.
아무도 모르게
속이 비어 갔다.


어느 날
샛문은 더 굳게 잠겼고
텃밭은 다른 풀로 덮였다.
꽈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속이 빈 것들은
대개
가볍게 날아가거나
먼저 부서진다.


나는 아직 바깥에 서 있다.
문은 여전히 안에서 잠겨 있고
저녁은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부서진다.


이제야 안다.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 번
터져 사라진 것임을.


그럼에도
나는 가끔
입 안에 숨겨 둔 그 이름을
조심스레 굴려 본다.


누나.


속이 빈 열매처럼
가볍게 울리는
그 소리 하나가
아직
나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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