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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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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 3
3일 뒤 데이터가 삭제됩니다.
Version 2.
새로운 입력값이 감지되었습니다.
꿈에서 상상하던 이상형이 오늘 내 볼에 뽀뽀를 했다.
계약연애의 끝이 3일 남은 때였다.
계약연예의 끝, D-3.
미팅 날이 되었다.
미팅 장소는 혜화역 3번 출구, 대학로였다.
처음 가보는 대학로는 정말 멀었다.
30개 역, 환승 한 번. 꼬박 1시간 30분이 걸렸다.
젊음의 거리, 대학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쯤 지쳐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대학로는 북적였다.
처음 느껴보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공연 보러 오세요!” 길을 따라
연극과 공연을 홍보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공원 간이 무대에선 통기타를 치는 예술가가 노래하고 있었다.
옷을 좀 차려입고 올걸,
별 기대가 없어 트레이닝복을 입고 온 것이
후회되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일찍 약속 장소로 가 자리를 잡았다.
나와 친구들은 첫 미팅의 설렘에 긴장하고 있었다.
“저기, 인하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맞으세요? 저희는 서울여대 수학과. 철기 친구예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한 단어가 있었다.
이상형.
하얀 피부, 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
흰색 티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청치마.
그녀는 고등학교 모태솔로 시절부터
내가 생각해 보던 이상형 그 자체였다.
마치 하늘에 휘날리던 벚꽃이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만 같았다.
띵동 알람이 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녀였다.
하지만 알람이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울렸다. 문자가 왔다.
‘미팅 재미있어? 아직 3일 남았는데...?’
그 애였다.
갑자기 3일 남았다는 말을 한다.
하필 미팅에 와 있는 이 시점에?
지난 한 달, 나에게 남은 시간을 계속 이야기하고는
기어이 그 시간에서 어긋나 버렸는데,
이제 와서 남은 3일을 왜 이야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응, 대학로 진짜 좋다. 너도 나중에 꼭 와 봐.’
답장을 하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술과 함께한 자리는 금방 달아올랐다.
‘배스킨라빈스 31’, ‘아이엠그라운드’, ‘바니바니 당근당근’, ‘더게임오브데스’.
그동안 갈고닦은 술자리 게임 실력이 빛을 발했다.
오늘 게임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었다.
모든 게임의 작대기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31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31)
닉네임을 연달아 외쳐야 했다. (아이엠그라운드)
모든 손가락이 그녀를 지목했다. (더게임오브데스)
나는 술을 한두 잔 정도밖에 먹지 않았다.
이상형 그녀는 또 게임에 걸렸다.
소주잔은 바쁘게도 그녀의 앞으로 배달 됐다.
“못 먹겠으면 흑기사해. 대신 소원 하나 들어주면 되지!”
친구들 중 하나가 말했다.
모두가 가슴속에만 품고 있던 그 말이었다.
술잔을 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흑기사 할래. 홍승찬, 나 이거 좀 마셔줘!”
의외였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 흑기사를 외쳤다.
부러움의 눈빛이 따라왔다.
나는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역겹던 소주가 술술 넘어갔다.
내 옆에 앉아있던 그녀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주변에서는 “소원! 소원! 뽀뽀! 뽀뽀!”하고 외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볼이 발그레한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닿은 듯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방금 전 마신 알콜이 혈관을 타고 휘몰아쳐
내 얼굴을 뜨겁게 달궈놓았다.
뽀뽀 이후 내 눈은 한 곳에 고정되었다.
고개를 돌려도, 몸을 돌려도 눈은 한 곳에 끌렸다.
그녀와는 자주 말 끝이 겹쳤다.
웃음의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았다.
벌칙으로, 흑기사로서의 가벼운 맞춤이었지만
더 깊은 곳의 마음이 겹쳐지는 착각이 들었다.
이것 역시 처음의 착각이었을까.
주머니 속 핸드폰이 또다시 울린다.
진동이 신경 쓰였다. 나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읽지 않은 문자가 3통이나 남겨져 있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25%밖에 남지 않았다.
남겨진 문자를 눌러 내용을 확인하고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나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 곧 끝나. 집에 갈 때 연락할게."
그렇게 찜찜함을 남긴, 밤 11시.
술기운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혜화역 입구를 서성거렸다.
"즐거웠어! 다음에 또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
그렇게 헤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어깨에 툭툭 두드렸다.
어깨에 닿는 손길이 낯익었다.
그녀였다.
"나 집에 데려다주라. 같이 가고 싶어."
역시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바람에 날려온 벚꽃 잎을 두 손에 담고 싶었다.
어깨에 닿은 온기를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 얼굴에 비친 밝은 미소를 따라 발이 먼저 움직였다.
다시 한번 주머니가 진동했다.
그러나 그날 밤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은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