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걷던 시절: 꿈 너머의 꿈
32-3 천재 (1)
나는 어렸을 때 천재라는 소리를 두어번 들었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어린시절 나의 실력은 터무니 없었지만, 아마도 내가 작은 우리동네에서 바이올린을 제일 잘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연습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던 같다.
나의 열정과 셀프 모티베이션을 기특하게 보신 어떤 현악사 사장님이 나를 천재라 부르시며 악기를 지원해 주셨고, 12살부터 서울에 올라와 그분의 말대로 내가 정말 ‘천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길을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온 후 나의 연주를 본 사람들은 천재라기엔 좀 별로인데.. 라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하거나, 그저 천재라 불린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하게 봐주었다.
바이올린 교수님들 눈에 나는 천재는 아니어도 “가능성 있는 학생” 혹은 “재주있는 사람”이었다. 작은 동네에서 제일 잘하기는 쉬웠으나 서울에서 이름난 콩쿠르를 휩쓸며 예중예고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이들 사이에서 천재는 함부로 불리울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가능성 있다, 재주있다 라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했고 그들의 말대로 나에게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이나 ‘재주’를 혹여나 흘려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기위해 전심으로 내 길을 걸었다.
몇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내가 원하던 피바디에 들어갔을 때 마침내 나는 마치 내 가능성과 재주를 증명한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내게 숙제처럼 주어졌던 천재라는 이름, 그리고 그다음엔 가능성과 재주있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에 맞는 단추를 처음으로 제자리에 끼운 듯 했다.
고생 끝에 내게 주어진 피바디에서의 시간은 그 어느 인생시절보다 달콤했다. 몇 몇 첫 수업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중 하나가 1학년 시창청음 수업시간이었는데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질문하셨다.
본인이 1세대로 음악을 시작한 사람 있나?
그 수업은 절대음감들만 모아놓은 수업이었는데 대부분이 2세대였고 3세대인 친구들도 꽤 있었다. 부모님 혹은 할아버지 세대부터 음악을 해와 음악 유전자가 흐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각자의 동네, 크게는 나라에서 천재라 한 때 불렸거나, 지금도 불리우는 아이들을 그 때 처음, 떼로 만난 것이다.
그때를 시작으로 학사 석사 박사의 시간동안 나는 수많은 ‘진짜’ 천재들을 만났다. 한 때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로 화제가 되었던 친구, 유럽에서 각자 자기나라의 지원을 받고 온 친구, 중국에서 이미 유명한 친구, 국제콩쿠르에 매번 나가서 상을 받는 스타 친구..
그리고 천재의 끝판왕은 그런 천재 학생들이 믿고 따르는 전설들, 학교 교수님들이었다. 그들의 연주를 듣고 함께 수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며 한 때 천재라 불리웠던 나의 재주와 가능성은 잠시 강가에 잠깐 반짝하고 스쳐지나가서 지나간지도 모를 햇빛조각만큼 쬐끄만, ‘센스’ 정도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내가 한때 그렇게 불렸다는 게 낯뜨거워 마음 속 깊숙한 서랍, 그것도 맨 뒤로 밀어놓고 다시는 그 말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았다. 천재의 끝판왕인 선생님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수업을 듣고, 연주를 듣고, 레슨을 받는 시간들이 그저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 중 내가 매주 두 세 번씩 만나 레슨을 받는 지도교수님들은 정말 겸손하고 인간적이고 훌륭한 연주자들이셨다. 내 학부 선생님은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 불리우던 소녀였다.
아주 어린나이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캐나다, 유럽, 미국 무대에 서고, 저명한 국제콩쿠르에서 상을 받고 무려 20대 초반에 피바디 음대의 교수가 되었다.
석사 선생님 중 한분은 발레에 빠진 인문학도 대학생이었다가 몇 번 레슨도 받지 않고 줄리어드에 발탁되어 도로시 딜레이에게 레슨을 받다가 오랫동안 미국에서 저명한 실내악팀의 일원으로 연주했다.
내가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연주자들을 내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그들에게 레슨을 받고, 이 길의 끝에서 그들과 어느 모양으로든 그들과 비슷한 삶을 살게 되길 바랐다. 그게 내가 유학을 떠나며 끼우고 싶던 두번째 단추였다.
나는 그렇게 꿈 너머의 꿈에 가까워지는 듯 했다.
한편, 대학원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서 학교를 가려면 버스 타면 15분이 걸리고 걸어가면 40분-45분 정도 걸렸다. 버스가 시간표대로 오는 적이 거의 없어서 수업에 맞춰서 가려면 걸어가는 편이 나았다. 그나마 시간이 덜 걸리도록 줄이려면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가야했다.
미국의 묘지는 한국처럼 흰 한복을 입은 귀신이 나올리도 없고 꽃나무, 단풍나무들로 경치가 좋고 아름다워서 걷거나 운동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1800년대 때부터 현대까지 가문별로, 가족별로 묻혀있는데 그 중 19세기 어느 태어난 날 죽은 아기를 위한 엄마아빠의 사랑이 담긴 묘비부터 미국의 어느 대통령 묘지까지 세기를 거친 무수하고 다양한 무덤들이 있었다.
매일같이 이 곳을 지나며 이 모든 공부가 이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라는 질문을 피할수 없었다. 과제나 시험이 어려워 노트를 들고 외우면서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갈때든 연주나 레슨이 잘 풀려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든 그 곳은 내게 겸손, 궁극에 대해 가르쳐주고 가지지 못한 것에대해 더 슬퍼하지않도록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내가 유학 기간동안 진짜로 얻어야 할 것과 버려도 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그곳에 사는 2년 내내 주어졌던 거다.
동시에, 가까이에서 만나본 진짜천재들의 삶은 아이러닉하게도 나나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선생님들 중 어떤 분은 오래됐지만 본인과 여러 삶의 순간을 함께한 허름한 승용차를 끌고, 또 어떤 분은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깔로 만든 털실조끼를 겨울마다 꺼내입고, 본인이 제일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양가죽신발만 일 년 내내 신는 등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보여주었다.
또 내 선생님들 중에는 자식을 음악인으로 키운 분이 없다. 그 자녀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모두 각자의 페이스대로 각자의 길을 가도록 조력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그들의 천재성은 자식에게 유전적으로 환경적으로 또는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물려주어야 할 것들이 아니어 보였다.
그분들 역시 그저 내 주변에서 흔히 보던 사람들처럼 사춘기 아들 때문에 골치가 썩고, 이혼으로 인해 아파하고, 잘 풀리지 않는 연애에 힘들어하고, 아픈 아버지를 케어하기 하며 눈코뜰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전에 없었던 질병으로 인해 무너지는 삶을 경험하고 있었다.
석사를 하던 중 나의 지도교수님 중 한분은 오랫동안 활발히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많이 가르치신, 그래서 그 분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올 정도로 티칭 좋기로 유명하신 분이셨는데, 예상치 못하게 갖게된 병으로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셔야 할 상황이었다.
어느날 그분이 내 앞에서 소년처럼 우시는데,
하필 그때의 나는 유학생활 중 가장 가난하고 가장 연약할 때였다.
내가 유학와서 공부하는 목표가
내 앞에 있는 이분들처럼 되는 것이었는데..
내가 가졌던 꿈 너머의 꿈에
물음표가 던져지던 순간들이었다.
천재 (2)에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melodyandscrubs/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