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살면 뒤처지고 패자가 되서야 되겠는가
미국의 심리학자 **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가 피라미드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하위 단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될 때 상위 욕구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문화와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 이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틀로 작동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욕구의 단계를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충족하고 있는가.
최근 몇 년간 반복되는 고위 공직자 청문회, 사회 지도층 인사와 유명인들의 편법·불법·도덕적 결함은 더 이상 낯선 뉴스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장면들이 이미 그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아직 그 세계에 완전히 진입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꿈을 꺽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이 장면들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다.
“정의롭게 살아서는 안 된다”, “원칙을 지키면 뒤처진다”는 메시지를 학습시키는 사회적 폭력에 가깝다.
기성세대는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는 무책임한 말로 얼버무린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가?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 부족이 아니다.
문제는 정의롭지 않아도 통과할 수 있고, 오히려 정의롭기 때문에 배제되는 구조가 반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조직과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제도와 규범을 갖추었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송하고 있다.
겉으로는 원칙을 말하면서, 실생활에서는 편법을 묵인하고,
결과적으로는 성과와 성공만을 보상한다.
그 과정에서 빠른 경쟁을 먼저 통과한 사람들의 결핍된 태도와 왜곡된 욕망이 뒤늦게 드러날 때, 사회는 분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태도로만은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체감해 왔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원칙을 지키다 배제되었고,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결국 부당한 질서에 편입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 현실 앞에서, 후배나 젊은 구성원이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는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가.
“원칙대로 하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말이 책임지지 못할 조언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관련되지 말라”거나 “조심하라”는 말로 물러선다. 그 순간, 정의는 개인의 용기가 아니라 회피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회를 만들어온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거창한 개혁이나 선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냉소를 유산으로 남기지 않는 것.
편법을 ‘현실’이라는 말로 미화하지 않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
잘못된 성공이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최소한 불편함을 유지하는 것.
정의는 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불의는 정의를 짓밟을 수는 있어도, 소멸시킬 수는 없다.
희망은 거대한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아직 다른 세상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믿음을 완전히 부숴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최소한으로 져야 할 책임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