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의 뇌, 걷기의 뇌

1.2. 우리는 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가

by 성효경

인간의 뇌는 절대값보다 차이값을 계산하도록 진화했다. 생존의 효율성을 위한 본능이었다. 원시의 환경에서 모든 사물의 정확한 수치를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더 위험하다'와 '덜 위험하다', '더 많은 음식'과 '더 적은 음식'을 구분하는 능력만 있으면 충분했다. 절대적인 수치를 저장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상대적인 비교는 빠르고 경제적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상대적 부호화(relative coding)'라고 부른다. 뇌는 사과의 정확한 빨간색을 기억하는 대신, 옆에 놓인 사과보다 더 빨간지 덜 빨간지를 기록한다. 무게도, 거리도, 온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뇌는 그렇게 '비교의 뇌'로 세팅되었다.

이 본능은 오랫동안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바나에서 두 갈래 길 중 어느 쪽이 더 안전한지, 두 열매 중 어느 것이 더 익었는지를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은 곧 생존 확률이었다. 그러나 문명화된 오늘날, 비교의 회로는 생존이 아닌 불행의 회로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맹수를 피해 달리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속도와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SNS의 타임라인을 스크롤할 때마다 뇌는 무의식적으로 차이값을 계산한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덜 행복하다', '내 아이는 저 아이보다 뒤처진다', '내 집은 저 집보다 작다.' 문제는 이 비교의 대상이 이제 옆집 이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발리의 풀빌라가 뜨고, 유튜브에는 20대에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의 브이로그가 올라온다. 원시 시대의 뇌는 한 번에 수십 명 정도의 동료와 자신을 비교했지만, 지금의 뇌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타인과 자신의 차이값을 계산한다. 비교의 대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 비해, 뇌의 하드웨어는 수만 년 전 그대로다. 차이값의 폭이 클수록 만족도는 급격히 줄어든다. 뇌는 여전히 생존 모드로 작동하지만, 그 계산이 이제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연산이 되었다.


절대값의 감각

행복은 절대값의 회복에서 비롯된다. 비교를 중단하라는 뜻이 아니다. 비교 이전의 감각을 되찾으라는 뜻이다.

오늘의 하늘을 본다는 단순한 행위를 생각해보자. 어제의 하늘보다 예쁜지, 제주도의 하늘보다 맑은지를 따지는 순간 그 하늘은 비교값이 된다. 하지만 그냥 올려다보기만 하면, 하늘은 하늘이다. 뜨거운 커피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아이가 웃는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질 때, 이런 감각들은 누군가와의 차이로 측정할 수 없다. 어제보다 나은지, 옆집보다 큰지 따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이 절대값이다.

뇌는 이 감각을 잊어버리지만,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글 때 느껴지는 안도감, 깊게 숨을 들이쉴 때 가슴이 열리는 느낌, 맨발로 풀밭을 걸을 때 발바닥에 전해지는 촉감. 이런 감각들은 비교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도착하는 신호다. 뇌의 연산을 우회해서 곧장 만족에 닿는다. 삶의 만족은 차이의 크기에서 오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그것이 인간이 되찾아야 할 가장 오래된 안정의 공식이다.


걷기라는 저항

비교의 뇌가 만든 속도의 착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걷기다.

걷는다는 것은 세상의 속도에 저항하는 행위다. 자동차와 스마트폰, 일정표와 알림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가속된 몸을 잠시 멈추게 한다. 시속 4킬로미터. 인간이 편안하게 걷는 속도는 수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KTX와 5G로 빨라졌지만, 두 발의 속도는 진화하지 않았다. 걷기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느리다. 그리고 그 느림이 핵심이다. 발이 땅을 밟는 리듬이 일정해질 때, 머릿속의 속도도 서서히 느려진다. 그 느림 속에서 비로소 절대값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걷는 동안 우리는 비교의 축에서 벗어난다. 걷는 사람에게는 옆 사람보다 앞서야 할 이유도, 더 빠르게 도착해야 할 의무도 없다. 바람의 방향과 햇빛의 온도, 나뭇잎 그림자가 만드는 패턴을 따라갈 뿐이다. 흥미로운 건, 이 감각들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뇌가 차이를 계산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감각이 가득 차면 비교가 들어올 공간이 없어진다. 남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단순한 사실뿐이다.

걷기는 과거의 인간이 절대값 속에 살던 방식이기도 했다. 사냥과 이동의 시절에 인간은 걸음으로 세계를 이해했다. 눈앞의 풍경, 발끝의 감촉, 흙냄새, 동료의 숨소리. 모든 감각이 동등하게 작동하던 그때, 뇌는 비교보다 연결에 익숙했다. 자기 몸과 주변 세계가 하나의 흐름 안에 있었다. 문명이 뇌를 차이의 회로로 재배선했다면, 걷기는 그 회로를 다시 연결의 회로로 되돌리는 복원 작업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우리는 남과의 거리가 아니라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 간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나의 리듬으로 돌아오는 일, 그것이 걷기의 본질이다.


걸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뇌의 회로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한번 떠올려보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우리의 몸은 거의 정지해 있다. 눈만 움직이고, 손가락만 미끄러진다. 뇌도 마찬가지로 시각과 판단을 담당하는 좁은 영역만 과열된 채 돌아간다.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는 동안 뇌는 쉬지 않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반응한다. 하지만 몸은 멈춰 있다. 뇌의 일부만 혹사당하고, 나머지는 잠들어 있는 상태. 현대인의 뇌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불균형 속에서 보낸다.

걷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뇌 전체가 고르게 깨어난다. 전두엽이 경로를 판단하고, 해마가 공간을 기록하고, 소뇌가 균형을 잡고, 감각피질이 발바닥의 압력과 바람의 촉감을 처리한다. 이 모든 일이 한 걸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스마트폰이 뇌의 한쪽만 과부하시키는 활동이라면, 걷기는 뇌 전체를 고르게 쓰는 활동이다. 과부하가 걸려 있던 비교와 판단의 영역이 쉬기 시작하고, 잠들어 있던 감각과 공간 인식의 영역이 다시 켜진다.

뇌파도 바뀐다. 신경과학 연구들에 따르면, 일정한 리듬으로 걸을 때 알파파(8~12Hz)가 증가한다. 알파파는 긴장하지 않으면서도 깨어 있는 상태, 명상할 때 나타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뇌파다. 동시에 해마를 중심으로 세타파(4~8Hz)도 활성화되는데, 이 파형은 공간 탐색, 기억 형성, 창의적 사고와 관련이 깊다. 스탠퍼드 대학의 2014년 연구에서 걷기가 창의적 사고를 평균 60퍼센트 향상시킨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이런 맥락이다. 걷는 동안 뇌는 비교의 잡음을 줄이고, 감각과 사고를 더 유연하게 통합하는 상태로 전환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속도다. 정확히 말하면, 느린 속도. 빠른 걸음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경쟁이 된다. 만보기 숫자를 채우려고 팔을 휘저으며 걷는 건, 뇌 입장에서는 SNS 스크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한 비교의 회로는 꺼지지 않는다. 반면 일정한 리듬의 느린 걸음은 다르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 단순한 교대가 반복될 때 신경 회로가 안정되기 시작한다. 호흡 명상이 들숨과 날숨의 반복에 의식을 고정하듯, 걷기는 두 발의 교대에 의식을 고정한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뇌과학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은 걸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걷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은 책상 앞에서 짜내는 생각과 질이 다르다. 계산이 아니라 흐름이고, 판단이 아니라 연상이다. 비교의 회로가 잠시 쉬는 동안, 평소에는 만나지 않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걷기는 뇌에게 주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휴식이면서, 동시에 가장 생산적인 형태의 사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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