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마무리, 무엇이 달라졌는가

여전히 내면아이가 존재하지만 인정하고 달래 줄 수 있게 됐다.

by 제니
“나는 삶의 가장 깊은 본질만을 만나고 싶어 숲으로 들어갔다.”

_by 윌든 中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건 어떤 로맨스보다도 더 많은 흥분과 행복을 가져온다. 나는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자아 발견의 기쁨을 한번 생각해 보라. 문제를 해결하고, 책장을 만들고, 춤 스텝을 고안하고, 넋을 잃을 정도로 스포츠에 열중하며, 친구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그걸 현실화시키는 모든 것들이다. 우리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모른다’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최전방에 서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네’라고 말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

_by 글로리아 스타이넘 <셀프혁명 中>


야심 차게 시작한 나만의 갭이어가 마무리 되어간다.

목표한 달 수는 6개월이었으나, 브런치 매거진 연재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은 약 8개월째가 되는 중이다.


사실, 지난 3월 이전 극심한 어려움 속 번아웃 상태였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바로 ‘내 맘속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아닐지, 그저 한낱 ‘욕심’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물론, 출퇴근의 어려움과 일터에서의 어려움, 여러 다른 고충도 있던 건 사실이다.


잠시 백수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기에, 그 상황에서 나를 지키고 한 단계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갭이어 프로젝트>였다. 아이와의 애착도 쌓고, 유치원도 잘 보내며 그 시간 동안 내 안의 결핍과 어린아이도 달래주며 나 또한 쉼과 재충전을 얻어 다음 스텝을 밟아가기 위함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퇴직금도 다 써버리고, 버킷리스트도 다 이룬 지금의 상태에서 이번 갭이어 프로젝트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마무리 차원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얻은 것


1) 내 안의 편견 깨부수기


누구에게나 편견이 존재한다. 그 편견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어려서부터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 의견, 생각일 수도 있고 성장하면서 스스로 만든 경험을 통해 제한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는 두 가지 편견이 있었다. 육아 체질이 아니라는 것과, 운전을 못할 것이라는 것. 이 두 가지가 삶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들인데 이 두 가지에 대한 편견은 직면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속 두려움을 심어줬다.

운전은 시력으로 인한 안전, 염려증으로 인해 운전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육아 또한 스스로를 불량 엄마, 나쁜 엄마라는 타이틀을 씌우고 부족감에 시달렸었다.


이번 내면 아이 달래주기 ‘갭이어(Gap year) 프로젝트 기간 동안 나는 이러한 편견은 스스로 만든 일종의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어느 한 면은 평생 못 보고 살 수도 있다는 것도 말이다. 감옥의 창살을 손으로 열고 한 발씩 밖으로 나가면 새로운 풍경과 가능성을 맞이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간 우리 하나뿐인 아들은 나의 원대한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 방해물이라는 인식이 마음속에 더 컸었다. 그러한 인식이 존재하니 아이가 순수하게 예쁘게만 보일 수는 없는 법. 나의 희생을 원하며 무언가를 자꾸만 포기해야 하는 존재로서만 알고 있던 우리 아들이,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깨달은 기간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도망가고 싶은 적도 많았다.


특히 지난 3월 학기초에는 유치원 입학 적응과 등, 하원 전담 적응, 집안 살림 적응을 동시에 하느라 정말 우울한 한 달을 보냈었다. 아이와 둘만 방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게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아이의 마음을 읽을지도 몰랐다. 2시 50분 하원 후 무엇을 할지 몰라 방황하다 버스 타고 근처 릴리펏 키즈카페를 주 2회 정도 다니며 정기권을 두어 번 끊기도 했다. 그렇게 추운 3,4월이 지나 5월 즈음 봄이 오니 아들과 나 사이에도 봄이 찾아왔다.


아마도 5월부터 일거다 아들과 둘이 있는 게 어색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워진 건. 아들의 친구 조부모님과도 사귀어 가끔씩 교류하고, 하원 후 놀이터에서 모르는 엄마들과 20~30분씩 이야기하며 그나마 소소한 즐거움을 얻기도 했다.


아들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자 에너지라는 사실을 이번 갭이어를 통해 깨달았으니 이보다 더한 깨달음이 어디 있겠나. 나의 죄책감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가장 귀한 걸 얻었다.



2) 아이와의 친밀성




사실 아들은 아빠를 더 좋아했었다. 돌 지나 친정 근처로 이사 가서부터 세 돌까지는 정말 주말마다 이른 아침에 아빠가 데리고 나가서 놀이터에서 함께 놀며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바쁜 일정이 있을 때는 아들과 뮤지컬, 공원, 키즈카페, 전시 등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해준 아빠 덕에 아들은 아빠 바라기였고 엄마, 아빠 둘이 있으면 ‘아빠’를 먼저 찾았다.


가끔 서운하긴 했는데 그랬던 아들이, 가장 사랑하는 건 ‘엄마’고 나중에 ‘엄마’랑 결혼한다고 말하니 이만하면 많이 친밀해졌겠다.


물론, 아직도 삐지기도 하고 눈치보기도 하지만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 걸 몸소 느낀다. ‘엄마’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고 웃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리얼한 팩트다.



아들과 엄마가 정말 애정과 애증을 다 겪으며 씨름하고 부대낀 시간을 통해 웃음과 울음이 함께 한 이 시간이 ‘관계’를 매우 좋게 만들어줬다. (역시, 모든 관계는 투자인 건가…)



3) 인간관계
아들 유치원 친구의 엄마, 할머니, 이모할머니 등 새로운 인간관계를 얻었다. 친구처럼 가까워서 미주알고주알 다 터놓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교류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갭이어 한다고 정말 독거 성인처럼 지냈을 텐데 말이다..
ㅎㅎㅎ출근을 하지 않으니 말 많은 성향인 나는 누구와도 대화할 데가 없어 어떤 날은 거의 몇 마디 안 하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그런 차에 적절히 말벗이 되어준 이들이 있기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4) 풍부한 지적 자극 및 공부

내 안의 예술가성의 기질을 발견했고, 미술, 작가, 독서 등 풍부한 지적 데이터베이스를 쌓았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미술관을 다니며 그때그때마다 맞춤형 위로와 자극을 얻었다. 혼자 여행을 하며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고독을 즐기며 ‘함께하는 것’의 가치도 알 수 있었다.



5) 개인 성찰
그간 ‘생산성’이라는 틀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가치를 평가하던 내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타인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며 성공과 실패, 노력과 나태, 판단과 비난 속에서 분주히 살아가던 모습을 보며 안타깝기도 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날을 불안으로 인해, 막연한 추측으로 인해, 강렬한 열망으로 인해 ‘현재’를 희생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며 살았는가. ‘누리지 못하며 살아온’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그것들을 하나씩 빼는데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물 빼는 작업 과정에서도 순간순간 불안함에 불필요한 액션을 취하기도 하고, 괜히 가까운 가족(남편, 엄마, 아들)을 이유 없이 잡고 함부로 대하기도 했다.


나의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취약한 내면의 민낯을 마주하기가 감당이 알 될 때도 있었으며, 이토록 지질하고 게으른 인간인가 하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희망에 불타오르며 새로운 꿈을 꾸기도 했다.


상담을 통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들을 약간 눈치챌 수 있었고, 그간 이상한 상대라고 원망해오던 이들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잃은 것


1) 약간의 건강과 몸매
아무래도 활동량이 줄고, 집에서 히키코모리 마냥 앉아서 글 쓰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하다 보니 근육에 과부하가 결렸는지 여름부터 이어진 오른손 건초염은 왼손으로 번지며 발도 아파졌다.

불규칙한 식습관과 운동부족으로, 퇴사 이후 4kg이 넘게 체중이 불었고 거울을 통해 비치는 모습에 살이 쪄가는 게 보였다.



2) 퇴직금

나름 큰돈이었기에 이 돈을 유용하게 투자하거나, 집안 가구를 바꾸거나, 백화점에서 왕창 쇼핑할 수도 있었지만 갭이어 버킷리스트를 수행하면서 사용하였다. 잔고는 이제 0.



3) 인간관계
직장생활을 하며 만나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기고 많은 관계가 끊겼다. 의도적으로 고요히 고독을 씹은 탓도 있겠고 이해관계가 사라져서 끊어진 관계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약속 많고 바쁘게 지내는 것이 성취요, 살아있음이라 생각해온 나에게는 상당히 낯선 경험이었다.




-깨달은 것


6개월가량의 내면 아이 달래주기 ‘갭이어(Gap year) 프로젝트를 통해 내 인생이 드라마틱 하게 달라졌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목표했던 버킷리스트를 다 이뤄서 내면 아이가 사라졌다고도 하지 않겠다. 쉼을 통해 재충전과 자신감만을 얻었다고도 하지 않겠다.



다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잘 지나가며, 아이와 매일매일 등원하며 본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바쁘게 산 날 중에 ‘하늘’을 못 보고 지나갈 때도 많았는데 겨울의 눈, 봄의 햇살과 벚꽃, 여름의 파란 하늘과 푸르른 녹음, 가을의 낙엽까지… 매일매일 오고 가는 길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


또한 ‘워킹맘’이라는 제한된 틀이 내 인생 전부인 마냥 그것으로 인해 성공과 실패를 조율했던 모습에서 좀 더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출, 퇴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일반 회사원 외에도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사도 깨달을 수 있었다. 물질적인 가치인 ‘돈’과 ‘화려한 타이틀’만이 어떤 큰 행복을 주진 않으며, 일상의 소소한 영역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좋아하는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 책 속의 한 문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전시… 그 모든 것들이 일상과 어우러질 때 ‘나’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겨운 일터, 보기 싫은 동료들, 회사 사람들과 먹기 싫은 점심밥,,, 등 그 모든 것들도 참 소중한 것임을 홀로 있으며 느꼈다.


‘일’이 주는 안정감과 셀프 자부심, 이런 것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무형자산이라는 것도 고독한 백수로 있으며, 스스로 느끼는 초라함 속 알게 됐다. 일을 하는 것도 스트레스지만, 마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자유의 몸이 된다 해도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님을.


인생은 ‘고민과 선택’의 연속인 것처럼 마지막 15회를 탈고한 이후, 나는 또 다른 선택의 길을 가야만 한다. 조직으로 들어가 재취업을 하거나, 창업을 통해 프리랜서로 일을 하거나, 작가에 도전하며 여전히 열심히 글을 쓰거나…어떤 형태로든 무언가 ‘일’을 하고 싶고, 해야만 한다.


달라진 건, 그 무엇을 하건 간에 그 자체에 감사함을 알고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전부’가 아닌 ‘일부’라는 마음을 갖는다는 점이다.




-아쉬운 것


인생은 한 번뿐이라, 또다시 이러한 자금과 기간 속 ‘갭이어(Gap year)’를 할 수 있다면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기에 갭이어를 마무리하며 아쉬운 점을 적어본다면….


-나태한 시간 줄이기(등원 후 티비 켜놓고 허송세월 등)
-원하는 아웃풋을 명확히 그려놓고 달성 여부 확인하기
(심리적 안정감 이런 것 빼고 실제적으로 측정 가능한 목표와 달성 여부 측정)
-좀 더 구체적인 계획과 루트(여행지 선정, 숙소 선정 등에서)


아쉬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은 이번 내면 아이 달래주기 ‘갭이어(Gap year)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아쉽다고 느낀 것도, 부족하다고 느낀 것도, 기뻐하며 행복해한 것도 다 ‘나’ 임을 받아들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


누군가 갭이어를 한다면 사실, 평소 본인의 모습과 180도 다르게 살아봐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계획이 많은 사람은, 무계획으로 살아봐도 좋다고. 시간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며 좀 살아봐도 된다고…. 근검절약한 사람에게는 돈을 좀 낭비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경험한 것을 통해 깨닫고, 동기부여받고, 나아갈 수 있다. 올 해는 ‘갭이어’를 통해 정말 많이 보고, 경험하고, 게으르고, 낭비하고 그런 시간들을 가졌지만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이제 사춘기를 장렬히 마감하며, 다가올 2019년을 알차게 그려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도 말릴 수도 없었겠지만 지지해준 남편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전한다.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려고 일도, 공부도 열심히 하며 육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편에게 때론 나의 현실을 ‘탓’하며 무수히 많은 공격과 싸움으로 불화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상대가 원인제공을 한 부분도 있겠지만 이 또한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 임을 나는 잊지 않아야 했다. 나의 불안함에, 지질함에, 화남을 성숙하게 해결하지 못한 지난날들을 반성과 고마움을 다시 한번 전한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착한 딸로만 기억하던 엄마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오랜 기간을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보고 도와준 엄마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상담받는 2~3개월 동안 주마다 집에 오셔서 아들을 봐주시고, 가끔씩 투정 부리고 비난과 공격을 하는 딸을 묵묵히 받아주심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부모님이 지금껏 훌륭하게 잘 키워주셔서 이러한 프로젝트도 할 수 있었다고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사랑하는 아들, 너보다 ‘나’를 키우는데 집중하느라 많이 신경 못 써서 미안하지만… 엄마가 살고 행복해야 네가 행복함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너와 내가 함께 자라기를 기대한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너를 낳은 일이라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이제 실천으로도 보여주도록 할게….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절망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도전한 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수많은 심리적 갈등과 방황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이 프로젝트를 완수함에 있어서 정말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 더 단단해져서 그 어떤 일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며 흔들리지 않게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하며… 너의 2019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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