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도망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소통'의 의미

by 심 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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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다소 서늘한 속담입니다. 피하고 싶어도 결국 마주치게 된다는 뜻이죠. 남에게 원한을 사거나 관계를 험하게 끝내면, 언젠가 가장 불리한 순간에 도망칠 수 없는 장소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인과응보의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이 말을 일종의 ‘처세의 문법’으로 사용합니다. “나중에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적 만들지 마라”, “사람 관계는 끝까지 좋게 가져가야 한다”는 식의 조언들 말입니다. 하지만 오십이 넘어 조직의 수많은 갈등을 목격하다 보니, 이 익숙한 문장이 조금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외나무다리야말로 원수를 파트너로 바꿀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협상 테이블이다.”


외나무다리는 분명 불편한 공간입니다. 뒤로 물러설 수도, 옆으로 비켜설 여지도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곳은 서로를 피해 갈 수 없기에 처음으로 상대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넓은 광장에서는 원수를 피해 돌아갈 수 있습니다. 보기 싫으면 다른 길을 선택하면 그만이죠. 하지만 외나무다리에서는 선택지가 단 두 가지뿐입니다. 누군가 물에 빠지거나, 아니면 서로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길을 나누는 것. 인사부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갈등을 중재해 보니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진짜 화해는 여유로운 순간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도 사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앙숙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획팀의 ‘강 팀장’과 영업팀의 ‘최 팀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몇 년 전 대형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회의실에 함께 있어도 공기만 공유할 뿐 말은 섞지 않았습니다. 메일은 늘 참조(CC)로만 오갔고 보고서는 저를 통해 우회 전달되었죠. 인사부장인 저조차 두 사람을 같은 회의에 부르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존망이 걸린 긴급 구조조정 TF가 꾸려졌습니다. 누구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실패하면 커리어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자리였죠. 그런데 경영진은 이 TF의 공동 팀장으로 하필 그 두 사람을 지명했습니다.


말 그대로 ‘외나무다리’였습니다. 뒤로 빠질 수도, 서로를 피해 갈 수도 없는 자리.


첫 회의 날, 두 사람은 테이블 양 끝에 앉아 서로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회의실 공기는 마치 냉장고 문을 열어둔 것처럼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강 팀장의 치밀한 기획력과 최 팀장의 무지막지한 추진력이 합쳐지지 않으면 이 프로젝트는 시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후, 둘은 밤샘 회의를 시작했고 처음으로 서로의 방식에 대해 솔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는 제 여유가 너무 없었습니다.”

위기를 넘기기 위해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과거의 오해까지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갈등의 골이 깊었던 만큼 신뢰는 빠르게 쌓였습니다. 프로젝트는 기적처럼 성공했고, 구조조정은 최소화되었으며 조직은 다시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 강 팀장이 제게 건넨 말은 잊히지 않습니다.

“부장님, 차라리 도망칠 수 없는 그 좁은 다리에서 만난 게 다행이었습니다. 안 그랬으면 평생 서로 미워했을 겁니다.”


외나무다리는 사람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을 가장 긴밀하게 묶어 세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 속담을 이렇게 다시 읽습니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났다면, 신이 당신에게 화해할 기회를 준 것이다.”

비즈니스 현장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습니다. 오십이 넘어 돌아보니 과거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원수 같은 사람’이 훗날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의외로 많이 보았습니다.


외나무다리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그 좁은 길에서 서로를 의지해 한 발씩 건너가기 시작하면, 악연은 의외로 쉽게 인연으로 바뀝니다. 살아보니 그렇더군요. 인생에서 가장 불편했던 만남이, 가장 오래 남는 동행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이 마주한 외나무다리는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곳인가요, 아니면 함께 건너기 위한 통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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