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잊지 못할 사람들
나무 같은 사람
머뭇거리면서도 매우 열의에 차 있던 한 남학생이 다녀갔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했고 그렇게 벌어서 여동생 둘을 모두 시집보냈고 인제야 못다 한 공부를 마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홍대 근처와 부산, 두 곳에 자기 식당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질곡의 세월 탓에 얼핏 머뭇거리고 주눅 들어 보이는 듯했지만 자기 얘기를 할 때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매우 단단하게 들렸다. 좋은 말들을 많이 해주고 싶었는데. 그의 재입학신청서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잃은 것은 청춘이었지만 그 이상 얻은 게 있다면 아마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희망이었을 거라고.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는 온실 속 화초와도 같은 요즘 아이들에게 비하면 그는 분명 제대로 뿌리박은 중간 나무는 될 거라고.
문화차이?!
예전에 국제협력팀 C와 함께 찾아왔던 중국인 여자아이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재입학 상담을 하러 왔길래 여차여차해서 신청서를 접수해준 아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내게 '감사하러' 왔다면서 봉투 하나를 내민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고마워서 감사 선물을 가져왔단다. 돈이나 재물이면 안 받겠다고 했더니 당황스러워하면서 그냥 편지란다. 진짜 편지 맞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이 없다.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십만원권 백화점 상품권이 두 장 들어 있었다. 못 받겠다,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너는 당연히 받을 수 있는 행정서비스를 받은 것뿐이다, 이렇게 '감사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내 일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받고 있으니 이건 그냥 마음만 받는 걸로 하겠다, 고 했더니 아이가 표정이 굳었다. 순간 아차 싶은 게, 내가 이 아이에게 은연중에 이런 걸 바란다고 말한 일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혹시 문화적으로 내가 거절하는 게 대단한 결례가 되는 일인가 싶기도 해서 당황스러웠다. 정 네 뜻이 그렇다면 일단 놓고 가라, 대신 너의 '선물'은 C 선생과 상의해서 처리할 테니 그것에 대해선 섭섭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녀석을 보낸 후 C를 불렀다.
그에게 그간의 일을 말하고 상품권을 가져가라 했더니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예전에 녀석 때문에 출입국사무소 방문 등 여러모로 많은 분들이 수고를 끼치게 됐으니 선물이라도 해야 할 정도라는 식으로 농담조로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내 탓은 아니었고 문화적으로 큰 결례가 된 것도 아닌 듯하여 나로선 다행스러웠다. 녀석의 '선물'은 결국 C가 되돌려 주는 걸로 처리했다.
존경하는 학부모님
학사팀에 근무할 당시 한 어머님이 찾아오셨다. 내게 아들 일로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하필, 왜 나를??? 일단, 학과에 가셔서 학과장님께 상담 요청을 드리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하니, 아니란다. 무조건 나에게 상담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아, 이미 학과사무실에 다녀오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앉으시라고 한 후, 아이는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사무실 밖에 서 있던 아들을 데려오셨다. 큰아이라며, 대학에 보내놓고 둘째를 위해 외국에 조기유학으로 나가 있었는데, 며칠 전 큰아이 성적표를 보니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살펴보니 아이가 군대까지 다녀온 4학년생임에도 거의 모든 성적을 낙제하는 상태에서 취득학점 또한 절반도 안 되는 상황. 일단 아이랑 직접 얘기를 나눠봤다.
"학생은 왜 학교 나와요?"
"친구들이랑 지내는 게 좋아요."
"그럼 혹시 본인이랑 헤어진 후 친구들이 뭘 하는지 생각해봤어요?"
"아니요."
"아마도 대부분 도서관에 가거나 아르바이트하러 가거나 어학원에 가거나 할 거예요. 왜냐하면 취업해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긴 해요."
"학생은 졸업하고 뭘 할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럼 본인이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생각해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저 친구들이랑 놀려고 학교를 나오다 보니 수업도 제대로 안 들어간 것 같네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언제까지 계속 본인이랑 놀아줄까요? 곧 졸업하고 나가면 같이 놀아줄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그땐 어떻게 할 거예요?"
"…."
"일단 쉬어가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이렇게 무의미하게 학교를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도 해보면서 본인이 뭘 좋아하고 뭘 잘할 수 있는지, 앞으로 졸업하면 뭘 하고 싶은지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처럼 다니다 보면 결국 학교를 안 나오게 될 것 같아요."
"……."
이 학생이 그동안 이런 생각들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다는 게 좀 충격적이긴 했다. 어떻게 보면 부모님들이 모든 걸 다 해주다 보니 스스로 고민하고 자주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실제 어머님의 기품있는 외모나 얘기 속에서 부족하지 않은 집안의 자식이란걸 알 수 있었다. 다행인 건, 아이가 태도가 소극적인 것 빼곤 착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나와 학생의 대화 중에 일절 간섭이나 끼어듦 없이 학생과 같이 내 얘기를 조용히 경청하는 어머님의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 학생이 밝은 표정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어제의 그 아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활달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 일단 휴학하기로 했어요! 학교 밖에서 뭐든지 한번 경험 삼아 해보려고요"
구체적으로 더 묻지는 않았지만 이날 이 학생의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나와의 상담 이후 어머님과 많은 얘기들을 했고, 그 속에서 본인이 뭐가 문제인지를 스스로 깨달았던 것 같다. 내 말대로 본인이 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 것이었고, 그걸 어머님이 허락한 것이었으리라.
이후, 내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다시 재회할 순 없었지만, 이 학생은 결국엔 잘 졸업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경험처럼 분명 일하는 것보단 공부하는 게 몇 배 더 쉽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찾아올 생각을 하신,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도 끝까지 아들의 말을 경청해주셨던 그 어머님의 태도로 보아 분명 훌륭한 아들로 성장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외팔 나팔수
대학입시 실기시험장 감독관으로 온종일 관현악 실기시험장에 있었던 때의 일. 바이올린 소리는 여전히 경쾌했다. 그에 반해 첼로 소리는 묵직하게 흐르며 가을 분위기를 냈다. 비올라 소리는 숲속에서 작은 새가 날아다니며 내는 소리 같았고 플롯은 나무들 사이로 스쳐 가는 바람 소리를 냈다. 내가 좋아하는 퍼커션 연주는 무척 신이 났고 때때로 날 흥분시켰다.
트럼펫 시험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했던지라 피곤하기도 했고 또 식사를 마친 후라 노곤함이 몰려왔었다. 조금씩 심사위원들과 함께 지쳐갈 즈음 한 아이가 한 손으로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마치 모자를 돌려 쓰듯 삐딱하게 트럼펫을 돌려 소리를 냈고 다른 한 손은 금방이라도 바지 주머니 속으로 구겨 넣을 듯한 자세…. 심사위원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고 몇몇은 서로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녀석의 트럼펫은 그다지 좋은 소리를 내지 못했다, 특히 고음에서는 노인의 기침 소리가 났다. 다른 한 손은 온전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끝까지 장애인처럼 한 손으로만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난 지독한 감기에 걸려 억지로 기침 소리를 삼키고 있었는데 꿋꿋하게 한 손으로만 트럼펫을 불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한순간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이 날 뻔했다. 녀석의 불량스러운 태도에서 나는 나팔 청바지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친구 녀석을 기억했고 한없이 유치했던, 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웠던 나의 유년기가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Boo Shit~! 을 외치던 호밀밭의 홀덴을 보았다.
녀석은 어쩌면 학원식 입시교육과 틀에 박힌 제도권 교육에 대해 그런 식으로 저항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할아버지의 눈물
우리 사회에 학력 위조가 이렇게 만연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학사팀 근무 당시 신○아라는 유명인의 학력 위조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마다 학력 조회 공문으로 몸살을 앓았다. 일개 과외교사에 대한 유선 의뢰부터 학원 등과 온갖 기관들의 조회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데 일일이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모 후보자에 대해 의원실로부터 직접적인 조회 요구가 들어왔길래 회신 불가하다 했더니 보좌관이 전화로 막말을 했다. 나도 똑같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왜 교육부를 통하지 않고 대학에 자료를 요구하느냐고 맞섰다. 이후 교육부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느냐고 했더니, 죄송하다면서 이런 일들이 없도록 다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한 개개인에 대한 학력 의혹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으나 교육부를 통한 자료요청 절차를 지켰어야 했다. 시간상 직접 전화로 요청한다는 건, 더구나 권세 있는 의원실이라고 막무가내로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이런 분위기로 인해 연예인들의 학력 위조가 공개되고 많은 비난이 따르고 있었는데 종교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번은 언론사로부터 모 종교 지도자에 대한 학력 사실 확인 요청이 있었는데, 범죄 등에 따른 수사기관의 협조 요청이 아닌 이상 답변을 해줄 수는 없었다. 사실 그 전화를 끊고 학적 보관실에 가서 찾아보긴 했는데, 재학 사실이 없었다.
학력을 속이는 건 일반인들에게도 흔한 경우였다. 학적과 근무 시절에 한 무리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한 개인에 대한 졸업 사실 조회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조회해줄 수 없는 사안. 얘기를 들어 보니 온 가족이 반대하는 언니의 결혼상대자가 이 대학 경상학과 출신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말해줬다.
"우리 대학엔 그런 학과가 없는데…. "
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봄날이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들놈이 이 대학에 다니는데 졸업할 때가 지났는데도 졸업한다는 말이 없어 직접 학교로 찾아오셨다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소 팔아서 지금까지 아들 등록금을 대주고 계셨단다. 그 자식이란 자는 입학한 사실이 없었다.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믿었던 자식에게 발등 찍힌 늙은 아비의 심정을 과연 누가 위로해줄 수 있을까?
나를 감동시켰던 조장 아이
리더십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학생을 통해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었다. 학생취업팀에서 일할 때였다. 2주간의 대면 교육을 마친 후 남은 방학 기간 각각 스터디 조를 편성, 자발적으로 취업 지원 활동을 하고 결과 발표를 마지막 활동으로 진행했었다. 이후에는 그 조의 조장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조원들의 취업 현황을 보고하게 했는데 그중 한 녀석의 메일에 큰 감동을 받았다.
조별 활동의 결과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그중 조장의 리더십은 가장 중요했다. 조장의 리더십이 뛰어났던 조의 경우 활동 결과 발표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실제 취업 성과와도 직결되어 그 결과가 나타났다. 그런 우수했던 조의 조장이었던 녀석은 이미 공사에 취업한 상황임에도 조원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놓지 않았다. 조별 취업 결과에 대한 회신 메일에서 아직 취업 못 한 각 조원들의 특징과 선호 분야를 꼼꼼히 기록해서 보내왔다. 예를 들면 A는 여학생이지만 당차고 진취적이며 특히 동물을 좋아해서 에버랜드와 같은 기업을 선호한다는 식으로 각 조원들에 대한 특징과 선호 분야에 대한 기록들과 함께 끝까지 잘 챙겨달라는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에 놀라긴 했지만 이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녀석에게 배운 방식으로 기회가 있을 때 기업체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썼고, 감동한 그분들로부터 신뢰라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지키지 못한 약속
입학팀에서 3월은, 거의 휴식기나 마찬가지였다. 팀원 중 두 사람이 제주도로 출장 여행을 떠났다가 금요일 오후 늦게서야 돌아온 날 저녁에 회식했다. 타 부서로 승진해서 떠난 J 팀장의 노고를 위로하고 전입생인 나와 새로 임명된 입학사정관 실장을 환영하는 자리.
국문과 교수이기도 한 김 처장님은 평소 예리하고 깐깐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얘기를 나눠보니 나름의 인간미가 있는 분이었다. 후배 직원의 농담을 친형님처럼 받아주는 등 사람들과 거의 거리낌이 없었다. 그분이 내 눈을 쳐다보더니 두 개의 글자가 쓰여 있단다. 하나는 선, 또 하나는 량. 옆에 앉은 후배가 그럼 자기는 모라 쓰여있냐고 했더니 우.량.이란다. 인심이 무척 후하셨다.
저녁을 먹고는 일부가 노래방에 갔다. 처장님과 팀장님이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다들 얼마나 잘 놀던지! 후배 직원들이 내게 와서 한마디씩 한다. 이런 모습들 처음 봐요! 지난 한 해가 꽤 고생스러웠던 게지. 앉아있는 나보고 갑자기 노래하라 해서 한 곡 했다. 컨츄리꼬꼬의 김미김미! 의외의 선곡에 다들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끝이 났다. 마무리로 처장님이 갑자기 만세 삼창을 했다. 김 과장 만세! 만세! 만세!
이게 김 교수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보직이 끝난 이후에도 교수님은 한결같이 나를 대해주셨다. 같이 식사도 하고 총장 선거에 나오신다고 하셔서 말리기도 했고, 재작년엔 갑자기 낚시를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처음으로 붕어를 잡아볼 수 있게 도와드리기도 했다. 사내 정치 좀 하라고 조언하셨다가 교육기관에서 무슨 정치를 하라고 하냐는 타박 아닌 타박까지 들으셨는데도 내게 한결같은 호의를 보여주셨었던 분….
공학관 앞에서 우연히 만나 식사 한번 하자고 하고 헤어졌는데 그게 그분과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 만남 다음 날 밤에 산책하시다가 차에 치였다는 급보를 듣게 됐다. 같이 식사하자는 약속도 못 지키시고, 꼭 다시 일어나시라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도 못 보시고 그분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내가 조교였을 때 학과장이셨던 M 교수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셨다. 햇병아리 총무인사과 시절, 사무실에 오셔서는 갑자기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내 칭찬을 하고 가셨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운데 다른 선생님들은 재밌다고 웃기만 했었다. 사실 그 교수님과는 조교 시절 씻지 못할 악연이 있었기에 이날의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번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6개월 정도 지난 후 그분의 부고가 떴다. 암 말기였다고. 늦은 나이에 결혼하셔서 자녀들이 아직 중학생일 때였다. 내게 미안하셨던 걸 마음에 품고 있다가 그런 식으로 풀고 가신 거였다.
떠나는 자의 편지
동료 선생님께 작별 인사드립니다.
지난 己丑年 설날은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새해를 설계하는 화목한 시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선배들께서 앞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도 정년을 맞아 희노애락(喜怒哀樂) 속에 젊은 시절을 보낸 정든 직장이자 청운의 꿈을 간직하게 했던 모교, ○○대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고전에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이란 ‘백마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 사이로 내다보는 것처럼 빠르다’는 뜻이지요.
누군들 흘러간 날에 대하여 절절한 그리움과 회한이 남지 않겠습니까만 저는 거기에 더해 26년 재직기간 동안 멀리서, 가까이서 저에게 베풀어주셨던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을 생각하면 새삼 가슴이 저려옵니다.
옛말에, 오십이 되어서야 지난 사십구 년을 헛살아왔음을 알았노라[五十知 四十九非]고 하였듯, 저야말로 ‘六十一知 六十非’인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여러모로 교만한 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저 낯 뜨겁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굳이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자면, 수도자의 삶이라면 혹여 모를까 속인(俗人)이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풍파 속에 어찌 허물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
지나친 욕심인 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저의 허물도 훌훌 털어내시고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용서[海諒]해 주신다면 떠나가는 제 발걸음이 한결 가벼울 수 있겠습니다.
겨울 행복 중의 하나가 ‘따스한 햇볕이 드는 오후의 여유’라더군요.
삭막한 이 겨울, 여러분의 마음에도 볕이 드는 툇마루의 따사로움이 찾아와 인생을 보다 멀리, 더 넓게 보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시인 김행자는 <나를 살게 하는 것>에서 ‘하늘, 별, 바람, 나무, 이슬, 햇살 그리고 그리움’을 읊었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단어들에 ‘행복, 사랑, 평화, 건강, 감사, 긍정적 思考, 安分知足, 파랑새, 호롱불, 山과 들, 여행’을 더하고 싶군요.
그러나 ‘고독’과 ‘사색’이란 고급스러운 말은 기적을 울리며 멀어져가는 기차의 뒷모습처럼 아쉽고 쓸쓸한 여운을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아무쪼록 웃음꽃이 만개하는 밝고 희망찬 앞날이시길 거듭 축원 드리며, 일본 하이쿠(俳句)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詩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동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울지 마라, 풀벌레야.
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담당자 시절이던 아주 오래전, 퇴직을 앞둔 선배 선생님에게 받았던 편지. 참 감사했다. 울고 웃었던 직장생활에 대해 스스로 정리의 시간을 가졌고 그 소회를 후배 직원들에게 편지로써 남기는 마음 자체가 참 아름답고 귀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선배들은 얼마나 이기적이었고 또 얼마나 욕심들만 많았던지. 내게 처음으로 존경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7년 전의 그분처럼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도 저런 말들을 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모나게 살아온 시간들 속에 꿋꿋이 버텨왔지만, 누군가는 나의 그런 모습들로 인해 상처받았을 텐데. 이분처럼 나도 미안했다는 말을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이 그러했다는 변명은 좀 아닌 것 같다. 내게 모질게 굴었던 선배들도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니 내가 이해해야 한다면 과연 나 스스로 이해가 될까? 다 내려놓고 털어내고 훌훌 떠나는 저분의 뒷모습을 닮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