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 나의 봄들아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할 때

by 나춘봉씨

세상에는 질서가 있고 모든 인간에게 따라야 할 법칙이 있다. 그 굴레 안에서 최대한의 업적을 이루어내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일 것이다. '위대한 것'은 그 모든 질서를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대단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아니며, 부처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인물인 것의 차이라고 할까.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생각되는 사람들의 핵심은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 대단해지느냐, 위대해지느냐의 문제는 결국 햄릿의 갈등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세상의 질서와 충돌하며 동시에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는다. 그것이 일반 사람들로부터 나를 격리하며 자신을 고귀하게 만든다. 고귀한 자존심. 그것이 바로 위대한 사람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근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물질적인 세상의 관점에서는 무용한 가치로 여겨질 때가 많다. 위대해지려는 사람들의 갈등이 시작점. 결국 실행이 답이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스스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내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위대해지려는 사람들은 위대함으로 가는 그 길 위에서 머뭇거린다. 버리고 가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다. 자칫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로 남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위대해지려는 사람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다. 그런 진흙탕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자리에 기다려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견디어내는 삶은 고도를 기다리는 고고와 디디의 유희처럼 결국 제자리걸음일 뿐이며 그것은 매번 짙은 탄식을 뱉어내게 할 뿐이다.

진정, 세상을 위대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 한발씩 내딛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결코 '대단한 것'도, '위대한 것'도 될 수 없다.

- 2011년 블로그에 쓴 글


I'm a Creep

학사팀 부서 회식 날, 2차로 들른 맥줏집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 ‘Creep.’ 대학가의 시끌벅적한 금요일 밤의 분위기 속에서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추고 모든 말소리가 희미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음악을 들어왔지만 이 노래만큼 한순간에 나를 사로잡고 내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강렬한 첫인상을 줬던 곡은 지금까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바텐더에게 노래의 제목을 물어서 핸드폰에 제목을 저장해놓고, 나중에 집에 와서 바로 곡을 찾아 내려받았다. 가사는 나중에 찾아봤는데, 더 공감됐다. 예쁜 여자가 아니라 인생을, 일을,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짝사랑한 찌질이가 바로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직장생활을 포함, 지금까지의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 나 스스로가 느껴왔던 알 수 없던 감정들을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노래였던 것 같다. 우직했지만 어리석었을지도 모를 내 인생에 관한 그런 노래였다고나 할까. 누군가가 나에게 지금까지의 삶에 관해 물어본다면, 그냥 이 노래를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의 눈에 나는 좋은 직장에 다니며 무난한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을 테지만 실제의 나는 그 안에서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혼자 노는 걸 즐기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가 선택했던 그 시간들과 내 모습들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이 노래처럼 결국엔 특별하고 아름다웠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았던 나의 30년에 대해 내가 느끼는 그 감정이 바로 이 노래에 담겨 있었다.


꼰대

인사청탁 덕에 이듬해 수시 시작 전에 입학팀장 직책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입학팀을 떠나오고 나서 야간대학원 행정실장으로 두 번째 이동했고 곧 세 번째 이동을 앞두고 있다. 내 몸에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발령받아 온 곳에서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원형 탈모까지 생겼고, 이제는 무릎까지 문제가 생겨 연골주사까지 맞는 처지. 그런데도 내 성격은 예전 그대로였다. 대놓고 꼰대 짓을 하기도 했다. 원래 직원들 간의 경조사는 잘 알든 모르든 품앗이처럼 십시일반 참여하는 게 조직 문화였는데 요즘 세대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선배들의 경조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대놓고 무시한다고 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내가 한마디 했다. 본인들 결혼한다고 모르는 선배들한테 찾아와 청첩장을 내미는 심리는 대체 뭐냐고. 다행히 이 얘기가 잘 전달이 돼서(?!) 지금은 후배들도 살짝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고참들 일부는 그들처럼 똑같이 후배들을 가려서 축의금을 내기 시작했다.

본부부서에서 일하는 일부 후배들도 좀 아쉬웠다. 담당자들은 맡은 일에 대해 지식과 전문성을 갖추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보였고, 팀장들은 효율성이라는 빌미 아래 본인의 책임 영역마저 자꾸 쪼개고 분산시키면서 그들의 리더십과 역량에 의문을 느끼게 만들었다. 몇 년간 본부부서들을 지켜봤을 때 업무 지식은 부족하면서 책임은 미루고 성과만 가지겠다는 이상한 리더십이 바이러스처럼 퍼져있었다. 일반 교수나 보직교수들이 실제로 직원들에 대해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도 몇 번 들었다. 때로는 과하다 싶다가도 대부분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책임 떠넘기기로 부당한 부담감이 외곽부서나 행정실로 밀려올 땐 나도 가만있기가 힘들었었다. 가장 상위 리더십의 아쉬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까지 포기하는 건 두고 보기 힘들었다. 누군가의 노예가 되기보단 차라리 일의 노예가 되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안다. 이젠 그 어떤 나의 말도 뒷방 늙은이의 잔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요즘 더 김사부가 보고 싶다.

- 꼰대질하는 건 다른 교수님들이랑 똑같으시네요? 전공의 나부랭이 주제에 함부로 대들지 마라, 까불지 마라, 애저녁에 싹 죽여놓고, 기 꺾어놓고 시작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지금?

- 하, 이 X끼 봐라, 이거?

- 이 X끼라뇨?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쇼, 선생님!

-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든가, 그럼! 야, 교육인지 훈육인지 구별도 못하고 나이 많은 것들이 하는 소리는 죄다 골질에 꼰대질로 제껴버리면서 선생님은 무슨 말라 비틀어질 놈의 선생님이야! 노력도 안 하는 주제에 세상 불공평하다고 떠드는 X끼들, 실력도 하나 없으면서 의사가운 하나 달랑 걸쳤다고 잘난 척하는 X끼들! 지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 X끼들! 그냥, 아주 그냥 대놓고 조지는 게 내 전공이거든.

<낭만닥터 김사부 중에서>


사내 정치에 대한 생각

평소 친하게 지내던 전 상사이자 인문대 선배인 김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교수님이 내게 말했다. 남자라면 야망도 가져야 하고 적당히 사내 정치도 하고 그래야 한다고.

난 단박에 알았다. 총장이 되고 싶었던 본인의 속내를 내게 하는 조언처럼 포장하는 말인 것을. 그래서 내가 답했다.

“네, 그래야겠죠. 그래야 유능하다는 소릴 듣겠죠. 근데 말입니다, 전 그렇게 안 살아요. 왜냐면, 여긴 일반 회사가 아니니까요. 교육기관이니까요. 적어도 교육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이어야 하잖아요. 교육자가 교육을 안 하고 왜 정치를 합니까? 먼저 교육자가 교육자다워야 대학이 바로 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 이 생각 타협할 생각 없어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사실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행정업무란 것은 문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행정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평소 다른 부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분명 도움이 된다. 다만, 내 영달을 위해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인 거부감이 들었을 뿐이었다.


방어적 비관주의

"실장님, 여기저기 알아보니 일을 꽤 잘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일을 안 하려 드는 거죠? 그것만 아니면 참 좋을 텐데."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말하면 안 돼? 안 할 것처럼 말하면서 결국 해줄 거면 처음부터 기분 좋게 말해도 되잖아. 막상 하면 잘하면서 어이구"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가끔 던지는 말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답은 이랬다.

"전 어떤 일을 추진할 때 하나의 시나리오처럼 전체적인 과정들을 고려해서 일하는 편이에요.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일단 조심스럽게 접근하다 보니 늘 걱정이 많은 편이죠. 근거 없는 낙관을 싫어해요. 내가 확실히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으면 일단 멈추고 자세히 따져 보자는 게 제가 일하는 방식이에요."

몇 년 전, 어떤 사람의 글을 통해서 내가 일하는 방식이 방어적 비관주의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런 방식이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요인 중 하나라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내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나름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직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나보고 꼼꼼하다고 했지만, 평소 덜렁거리기도 하는지라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 잘 이해를 못 했었는데 이 용어를 알게 되면서부터 내 업무수행 방식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서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방식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조금 답답한 거 빼곤 딱히 내가 신경 쓸 말들은 아니었지만, 실제 결과보다 평가를 박하게 받을 땐 내가 문제가 있나 싶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전문직이나 예술가, 개인사업 쪽에서 좀 더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좀 더 젊었을 때 내가 일하는 성향에 대해 알았더라면 지금보단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 방어적 비관주의 (defensive pessimism)

일의 수행 결과가 나빠지지 않도록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고 불안을 통제하려는 수행 전략의 일종으로, 지나친 기대가 큰 좌절을 불러올 것을 알기에 낙관주의자들보다 더 낮고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결과물에 대해 광범위한 고려를 하는 것이 주된 특징.


나는 행복한 사람

30년 동안 16번의 이동 발령을 받았다. 16개 부서에서 일했고, 학사팀과 입학팀 두 번, 기획팀은 세 번을 발령받았었다. 역마살 있는 사람이 사무직으로 일하게 되면 그런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쨌거나, 서서히 내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한 번쯤 물어봐야 하는 질문, 나는 행복했는가?

나의 결론은, '그래도 행복했다'였다 성격 탓에, 상황 탓에, 역마살 때문에, 또 내가 가진 역량 탓에 순탄하지 않았던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비록 남들보다 많은 부서를 옮겨 다니면서도 나는 오로지 내가 해야 할 일만 바라봤고, 내 노력으로 변해가는 환경을 보면서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때때로 내가 했던 일의 결과들이 전쟁 같았던 건 내 고지식하고 원칙적인 성격 탓도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출세의 법칙은 간단하다.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하다고 말하고, 죄송하지 않은데 죄송하다고 말하고, 웃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웃으면 된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은 어떠한가? 이 모든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일 것이다. 더 이상 올라갈 수도 없고, 더 이상 올라가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남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처지이니 나는 분명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아니겠는가.


퇴직 후 뭐 할래?

몇 해 전, 친한 동문 선배 교수님의 퇴직 후 뭐 할 거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Nothing. 전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가정과 직장에서 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살아왔고, 그 속에 진정 나라는 존재는 있었지만, 사라졌다. 며칠 전, 퇴직한 선배가 점심을 사주며 또 같은 질문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아무 생각 안 하고 살고 싶습니다. 꼭 뭘 해야 한다면 며칠 동안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침묵 속에서 면벽수행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누구이며, 어떤 소명을 갖고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구하는 것, 그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것보다, 다른 사람보다 나를 먼저 바라봐 주기가 쉽지는 않다.

내 남은 시간에 더 노력해서 더 잘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그만큼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고, 누군가에게 하나하나 말할 수 있을 만큼 성과도 냈다. 인정받는 것과는 별개로 자기만족이라는 측면에서는 후회가 없다. 후배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우리 세대부터는 퇴직 후에도 연금이 바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예전 선배들처럼 낭만적인 인사를 건넬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다. 주변에 또래들은 그래서 자격증 공부도 하고 학업을 계속하기도 하는데 난 그게 다 쓸모없다고 느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실제 최근에 퇴직한 모 선배가 자격증이 있어도 나이가 많아 아무도 안 써준다고 했던 말은 내가 마주하게 될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입학팀장 시절부터 이런 부분을 고민하긴 했었다. 물론 평생 행정 일만 해온 사람에게 효과적인 결론이 나올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 대한 고민 대신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타로도 그저 해보고 싶어서 배워봤다.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다.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면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지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내 마음을 끄는 것들이 또 뭐가 있을지 계속 탐색하는 것, 기존에 해오지 않은 방식들에 관해 관심 두는 것, 이런 것들이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이라고 느꼈다. 이제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할 때

학교에서 일을 했지만 내 모교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부조리하고 부당한 일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일은 일일 뿐이었다. 나는 이 학교 출신의 교직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월급쟁이로서 당연한 것이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직장인으로서 엄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내 마음처럼 내가 하는 일들에 의미와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교이지만 직장으로서, 여러 직장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과 학교에 대해 좀 더 균형감 있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객관적이지 못한 이런 나의 태도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지금부터라도 적당하게 거리두기를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웃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감 못 한다고 타박하는 사람들 앞에선 입을 닫아버렸고, 사람들이 말하는 평판의 오류에 대해서도 무척 예민하게 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사기 같은 걸 당해본 적은 없었다. 가끔 겪었던 배신이나 뒤통수는 내가 그들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끝까지 쫓아와서 해코지하지 않은 건 그들이 아주 악랄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일 거다. 그들이 왜 나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를 따져 보기 전에 먼저 미움과 증오, 배신의 고통으로부터 날 용서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로부터 적당히 벗어나 나를 먼저 사랑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글을 마치며

일을 대함에 있어 나는 명분을 추구했고,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돌아보니 그동안 좋은 일도 많았고 억울한 일도 있었고 마음 아픈 일들도 많았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하는 그런 후회의 경험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 날에 가장 나답게 살았던 것 같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해온 이 일들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도 않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누구를 비난하거나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쓰다 보니 행여나 누군가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도 된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그 사람의 젊은 날들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당시에 일부 선배들의 꼰대짓이 너무 싫었지만, 내가 젊은 날을 지나고 보니 그들의 일부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성격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얘기들을 공개한다는 게 처음엔 두려웠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 가족이 되어줘서, 내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특히 평생 내 곁을 지켜준 아내와 병상에 계신 아버지와 내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큰 기온 차와 쌀쌀한 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잠깐씩 비추던 햇살에 마냥 행복해지는 봄날 같았다. 마지막으로, 애쓰고 지치고 치이면서도 지금까지 잘 버텨준 내 젊은 날의 영혼을 위로하면서 따뜻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다. 잘 가라, 나의 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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