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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짤리짤리 Jan 10. 2023

세컨드 라이프 - 게임과 가상현실

격차의 시대에 살아남기: 소비


몇 해 전 이사를 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집을 보며, 어느 집에서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던 TV가 예전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거실에서 TV가 사라진 집을 여러 번 목격한 것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쪽엔 TV, 반대편엔 소파'가 배치되던 거실의 모습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여가 시간에서 TV시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그것이 영상 콘텐츠 소비 감소를 의미하진 않는다. 전통적인 TV가 고전을 하는 동안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영상 플랫폼의 이용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방식을 달리 할 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더 오랜 시간 영상 콘텐츠에 빠져 지내고 있다.

변화를 인식한 광고주들이 홍보 채널을 대거 온라인으로 이동시킨 결과, 방송사들은 하나둘씩 적자로 돌아섰다. 방송사들은 고육지책으로 유튜브 같은 영상 플랫폼에 채널을 개설하고 변화의 흐름에 동참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스스로가 콘텐츠 제작자이자 독점적 유통자였지만, 생존을 위해 경쟁자 성격의 거대 플랫폼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신문사가 밟아온 경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스트리밍 되는 온라인 영상 콘텐츠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커져가며 여가 시간 점유율을 높여 가고 있다.

사람들을 개인화된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은 영상콘텐츠뿐만 아니다. 또 다른 한 축에는 게임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있다. 게임회사들은 온라인화. 모바일화. 아이템화 키워드를 앞세워 급격히 몸집을 불려 왔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게임산업은 전 세대와 성별을 아우른다. 어릴 적부터 전자게임을 즐기던 세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거부감 없이 계속 플레이를 하고 있으며 바둑, 장기, 포커, 화투등 전통적인 보드게임도 온라인으로 넘어오며 장년층 이상의 참여율도 높아진 지 오래다.

 사람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는 플레이의 재미도 있지만, 다른 근심 걱정들을 잊을 수 있어서 이기도 하다. 화면을 끄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플레이를 하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다. 스크린에 푹 빠져 있는 동안은 새로운 세상에 접속하며 일종의 분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린 이미 몇 시간씩 스크린에 몰입하는 경험에 익숙해져 있다. 심한 경우 밤을 꼬박 지새우거나 12시간 이상씩을 게임을 하며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 24시간 중 현실세계 보다 게임이라는 가상세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게임들의 궁극적인 모습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아마도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발전된 가상현실 속을 드나드는 형태로 발전하지 않을까.

 1993년 개봉한 영화 '데몰리션맨'에서는 2030년대 사람들이 가상현실을 통해 성관계를 맺는 장면이 펼쳐진다. 다양한 VR게임이 상용화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 날이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95년 '네트'라는 영화에서 인터넷으로 피자를 주문해 먹는 장면이 당시는 그저 신기하게만 여겨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이 되어버렸음을 알고 있다. 스마트폰은 이제 전화기(phone)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할 만큼 다양한 용도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음성통화는 전체 스마트폰 사용 시간의 아주 일부분만 점유할 만큼 부수적인 기능이 되어 버렸다. 기술발전이 또 무엇을 가능하게 할까?


영화 '데몰리션맨' . 공교롭게도 언급한 두 영화의 여주인공(샌드라 불럭)이 같다.


 상상해 보자. 만약 패배감에 젖어있거나 현실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심각한 우울감이나 상처로 삶의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가상현실이 새로운 삶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어떨까. 여가 활동으로서 잠깐의 환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여생 전체를 특수한 장치에 연결되어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실제 세계에서는 고작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이 흐르지만 가상현실 속에서는 10년 이상이 흐른 것처럼 서로 다른 시차로 프로그래밍된다면 경제성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상현실과 메타버스 같은 것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술이나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 실제 선택 가능한 현실이 된다면, 기꺼이 현실 세계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가상세계 속에서의 세컨드 라이프를 택하려는 수요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일뿐더러 지금처럼 비혼, 저출산 의 확산으로 1인가구가 늘어간다면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덜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고 격차 확대로 인한 비관이 확산되는 등의 사회 흐름 또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조금은 무서운 일이지만, 기술 발달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며 이를 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경계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사무직 직장인 들은 많은 시간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일을 하고,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한다. 틈틈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흥밋거리를 찾고, 때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본다. 눈 뜨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크기만 다른 여러 가지 스크린을 바라보며 보내는 것은 어느덧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확대되는 빈부격차는 여가활동에서도 차이를 가져왔다. 대게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시간이나 비용에 대한 구애 없이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기지만, 소득이 낮을수록 영상시청이나 게임과 같은 저비용 여가활동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격차가 커질수록 하위 집단은 현실을 외면하고 점점 더 스크린 속 가상현실의 세계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우려할 만한 사실은, 스크린에 몰입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떨어질 수 있다는 조사 결과이다. KBS다큐멘터리 읽기 혁명 제작팀에 따르면 중독 성향이 나타나는 '게임뇌' 상태를 보인 학생들은 심신이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의 뇌파인 베타파가 현저히 떨어지고 불안, 긴장등 스트레스파인 알파파가 겹쳐져 있는 형태를 보였다고 한다. 영상콘텐츠 역시 지식과 정보를 빠른 속도로 전달할 수는 있지만 전통적인 읽기에 비해 뇌의 활동, 특히 고도의 지적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활동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한다. 쉽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스크린 의존도가 높아지고 그 결과로써 즉흥적 반응과 단기적 사고에만 익숙해진다면, 이들의 직업적, 업무적 성과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이런 현상들이 계층 고착화를 강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요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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