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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 엄마 Aug 31. 2024

편식, 그 끝없는 전쟁

그림책 "밥한그릇 뚝딱"


아이는 3.56kg으로 태어났다. 아이는 신생아때부터 먹성이 좋아 금방 배고프다고 보채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았고, 유축기로 억지 유축을 하는건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다. 노산의 나이에 시험관 임신, 전신마취 출산 후 나는 임신과 출산에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모유마사지를 받는다는지 모유가 잘 나오는 식품을 먹는다는지 등의 정성을 쏟을 힘이 없었다. 결국 초유만 먹이기로 하고 분유수유를 시작했다. 엄청난 먹성, 분유의 고칼로리, 엄마 아빠의 뼈대를 닮아서인지 아이는 영유아 검진때마다 상위 1프로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의사선생님은 그때마다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각종 성인병의 위험에 노출될수 있다, 아이 몸무게 관리를 해라, 아이 생명과 직결된다 고 하시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아이가 잘 먹는다고 하면 안먹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엄청 부러워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의 경우 밥, 고기만 잘 먹는다. 면류, 빵류는 먹지 않고 야채류도 거의 먹지 않는다.

의사선생님의 호된 질책을 받은 이후 쌀밥을 잡곡으로 바꾸었다. 다행히 잡곡밥은 잘 먹었다. 문제는 야채였다. 오이 무침, 파프리카 양배추 콘옥수수 샐러드, 시금치 나물, 콩나물, 브로콜리 무침, 가지전, 애호박전 등등..수많은 야채요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협박"을 시도했다. 명분은 충분했다.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진다, 야채를 먹어야 체중을 조절할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이만큼 훌륭한 명분이 어디있겠는가. 협박의 도구는 "만화"였다. 야채반찬을 먹지 않으면 만화를 안보여주겠다고 했다. 야채반찬을 먹는 날은 만화를 보여주었다.

이런식의 협박은 다른 영역으로 옮겨갔는데, 옷을 스스로 입지 않으려 하거나 정리정돈을 하지않을 경우 등이 그러했다. 당장은 만화 안보여준다는 협박이 통하니 나는 점점 그런식의 방법에 익숙해져갔다.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인생 양육서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깨어있는 양육"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에서 나는 수없이 뼈를 맞았다. 특히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은 훈육이 아닌 조종이라고 했다. 아이를 통제하고 조종하는것이 당장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것 처럼 보여도, 결국엔 사춘기때든 언제든 부작용이 터져나온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는것과 만화를 보는것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데, 연관없는 것으로 조종하는것은 일종의 처벌이며 아이를 죄수처럼 부모 요구의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다는 일침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때 자연스러운 결과를 경험하게 하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각을 하면 부모가 차를 태워 데려다줄게 아니라 지각의 결과를 경험하게 하라고 한다. 반성문을 쓴다던지, 불이익을 받게 되면 아이는 알아서 자기의 행동을 교정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불안하기 때문에, 아이가 불이익이나 고통이나 피해를 겪는것을 막아주고 간섭한다. 그 결과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결과-인과 관계-를 습득하지 못한다. 이는 아이가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내가 하는 육아의 방식이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닌 처벌이라는 지적을 받고 나는 그 방식을 포기했다. 어느날, 곤드레 나물밥을 데워 저녁으로 준적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는 맛있다고 허겁저겁 먹었는데 그날은 도저히 못먹겠다며 연신 투덜댔다. 순간 조종-다 먹으면 만화 보여줄게-을 하고 싶었다. 아니면 김과 햄을 준비해서라도 먹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행동의 자연스러운 결과를 겪게 내버려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입맛에 백프로 맞게 매번 끼니를 차려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안먹으면 나중에 배가 고플거야. 그리고 그때는 밥을 따로 차려주진 않을거야"라고 이야기했다. 그날 아이는 밥을 거의 남겼고, 배고픔을 견뎠고, 나는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하지 않고 남긴 음식을 버렸다.

"밥 한그릇 뚝딱"에서는 아이에게 제발좀 먹어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엄마가 아닌 음식들이다. 김, 콩, 계란말이, 고등어 등이 자신을 제발 먹어달라고 어필한다. 영양가 있는 자기들을 먹으면 깨끗한 바다내음도 맛볼수 있고(김), 나무처럼 키가 쑥쑥 크며(콩), 왕자와 공주처럼 멋지게 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모님들이 너무나 공감하고 지지할 그런 주장 말이다. 음식들 입장에서도 아이들이 자기를 먹어주지 않으니 소외감이 들만 하다. 소세지, 햄, 튀김 등 인기 음식에 비해 선택받지 못하는 반찬들. 영양가는 훨씬 많은데 인기는 없으니 억울할 터이다. 아이들이 오죽 편식을 하면 이런 그림책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다. 그림책 속 비인기 반찬들의 호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의 깊은 바람이다.

아직까지 매번 끼니 때가 다가오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 음식을, 이 반찬을 아이가 과연 먹어줄것인지 조마조마 하다. 골고루 먹지 않을때에는 이것도 먹어봐라, 이렇게 먹어봐라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정성껏 차렸는데 잔뜩 남겨진 음식을 버릴때에는 아깝고 쓰라리기도 하다.

한번은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지난번 그림책에서 반찬들이 자길 먹어달라고 했던거 기억하지? 네가 먹으면 반찬들이 너무 기쁠것 같아." 이렇게 얘기해도 안먹는건 안먹더라. 그래도 그림책을 통해 익숙한 상황이나 상대를 다른 관점, 다른 입장, 다른 시각으로 볼수 있다는건 참 괜찮은 일 같다.

불안한 마음, 아까운 마음,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좀더 자연스럽게 파도를 타고 싶다. "깨어있는 양육"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을터이니 깨어있는 양육, 깨어있는 일상으로 오늘도 한걸음만 내딛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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