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옆 자리에 부녀가 앉았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어린이와 아빠가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아빠가 딸이 게임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같이 보며 이야기를 한다. 낯선 풍경이다. 대부분 아이들에게 폰을 맡기고 아빠나 엄마는 다른 일을 한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거나 볼 일을 본다. 혹은 동행한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 아빠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장면이다.
내릴 때가 되었는지 게임을 그만하자고 하면서 이제 꺼야 할 시간이라고 말을 한다. 그만하라고 하지 않고, 내려야 한다고 그래서 그만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다음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아빠가 귀마개를 꺼내면서 딸에게 귀마개 하라고 하지 않고, 귀마개는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하지 않는 게 좋을까 묻는다. 그러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귀마개를 하겠다고 한다.
선택을 부여하는 질문이다. 강요하는 질문을 대부분 하지 않는가.
자주 지각하는 후배가 있었다. 끝내 개선 효과를 갖지 못했다. 돌아보면 내 질문이 옳지 않았다. 좋은 질문을 하는 선배를 만나는 것은 일을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게 리더의 질문이 아닌가. 팀장이나 사수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봐라.
"언제까지 끝낼 거야?"
"언제까지 끝낼 수 있어?"
위에 문장처럼 말하는 팀장이 있다면, 드물게 아래처럼 말하는 팀장이 있다.
"며칠까지 끝내려면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재촉하고, 다그치면 좋은 결과나 답을 얻기가 어렵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고 하지 않나. 좋은 답을 얻으려면 좋게 질문을 해야 한다. 좋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겸손한 질문이다. 그게 나이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너 불만이 뭐야?"라고 질문하기보다는
"그럼 너는 어떤 것을 해보고 싶은 거야?"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김 대리, 지금 뭔 짓을 한 거죠? 대신에
"김 대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죠?"라고 물어보자.
마음에 안 드는 팀원이 실수를 하면 좋게 말이 나가지 않는다.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문책성 질문을 던진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면 된다. 그러나 잘잘못을 따지는 게 먼저다.
사람들은 어떤 질문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떤 질문을 받고 있는지 귀 기울여 보면 사람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