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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Apr 26. 2024

책 100만원어치

우리만의 조그맣고 행복한 거실



어젯밤이었다. 잠에 들기 전 이야기 시간(잠자기 전 수다타임을 이르는 말)을 보내는데, 오빠가 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책 100만원어치만 사고 싶다."

"진짜 100만원어치?"

"응, 사실 그거보다 더 많이 사고 싶어."

몇 달 전 오빠가 50만원어치의 책을 산 적이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릎 이상으로 올라온 책들이 두 줄이나 위태롭게 서 있는 걸 보니 약간 짜증이 났다. 중문을 열어재끼며 외쳤다.

"집도 좁은데 책을 이렇게나 많이 사면 어떡해!"

두 사람이 아늑하게 지내고 있는 20평대 집이 좁다고 생각한 것도, 그만한 책들이 공간을 많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실은 아니었다. 내 생각에 '책'이란 건 도서관에서 빌려서나 읽는 거지, 집에 쌓아 놓을 물건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는데 책처럼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이 없단다. 밀도가 높아서라나 뭐라나?




하여간 책을 사서 읽는다는 게, 맘에 드는 구석이 별로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휘황찬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싼 것도 아니다. 독서가 참 멋진 일이고 책이 최고의 지식 저장고라는 것도 잘 알지만.. 막상 집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빠가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헤실대며 말했다.

"히히- 다음부턴 꼭 허락 맡고 살게!!"

그러면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잇다야 나 책 많이 사서 너무 신나!!"

오빠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우리가 한 가족이 되려면 룰을 지켜야>된다는 느낌을 주고 싶어 꾹 참았다. 내 단호하고 진지한 태도에 오빠는 한동안 한 권, 두 권씩밖에 책을 사지 못했다. 그 후로 얼마간, 아마 2~3개월 정도는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오빠가 읽는 책들이 내가 유행 따라 주문하는 옷 보다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나? 그건 절대 아니지. 사실 따지자면 옷보다 책의 가치가 100배, 1000배쯤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옷가지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이 더 크다. 오빠는 내가 쇼핑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잔소리도 안 하는데, 내가 뭐라고 오빠한테, 심지어 책을 읽겠다는 사람을 나무랐나? 하물며 무슨 물건을 들였든 우리집 가장이자 소중한 가족 구성원인 오빠에게 짜증을 내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오빠는 저렇게 성격 좋게 받아쳤지? 나라면 빽빽거리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책 좀 읽겠다는데! 왜 책 읽겠다는데도 난리야~!"

(오빠.. 어쩐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__^)

*가장: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라는 말. 우리 집의 경우 '도덕적,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한 자'로서 인정할 만한 사람으로 오빠를 꼽음. 내가 방금 꼽음. 오빠가 남자라서 아님.

**가장을 '도덕적,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한 자'로 정의한 것은 라디오스타에 출연했던 장항준 감독의 말을 참고함.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오늘 잠들기 전, 꼭 이 글을 보여주고 사과해야지. 오빠의 취미이자 꿈을 지지하겠다고,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해줘야지. 우리만의 조그맣고 행복한 거실이 책으로 가득 차도 좋으니 오빠가 읽고 싶은 만큼 마음껏 읽으라고!


ps.

하지만 웬만하면 도서관에 갈 것.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구매할 것.

구매 전 예쁜 아내에게 사전 결재(승인) 받을 것.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클난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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