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순
내 가난했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중2 이후부터라 유년이라고 표현하긴 뭐 하지만 달리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튼 15세 이전엔 아빠 사업이 잘 돼서 나름대로 윤택하게 살았고, 외부 요인들에 의해 한 순간에 가세가 기울었다. 하지만 일전에 '금수저가 달리 금수저인가 2'에서 언급했듯 나는 그 시절에도 행복했더라고 자신한다. 그러다 얼마 전 읽은 모순을 보며 역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됐다.
불행한 사건과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별개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불행한 일일지라도 주관적인 해석이나 받아들임을 행복으로 정하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다. 우리 집에 빗대어 생각해 본다면 가난과 불행, 우울, 슬픔은 맥을 같이 하지 않았다. 이는 즉시의 수용을 어떻게 하느냐 뿐만 아니라 시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한 예로 내게는 머지않은 과거에 아주아주 힘든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처음엔 당연히 나락을 구르는 듯했다. 그 시기엔 고통, 말고는 내 인생에 끼어들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짐과 동시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처럼 시점이 이동하면 같은 사건에 대한 감상도 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사건도 꼭 행복한 감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행복한 사건으로 기인한 두려움이나 부담감이 행복감보다 더 크다면 그건 불행한 감정과 가까워진다. 혹은 초고층 아파트 영상에 달린 댓글을 상상하며 떠올렸던 '질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면, 행복한 사람을 질투하는 건 정말 심심치 않게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정리해서 행복한 사건이나 불행을 불러올 수 있는 구체적인 예로 승진(부담), 일잘러(업무 몰빵), 연애(정신적 에너지 소모, 데이트비용), 결혼(갈등, 시댁), 임신(부담, 경제적·체력적·신체적·정신적 소모), 합격(두려움), 당첨(낭비, 갈등), 경제적 여유(갈등, 질투), 빛나는 외모(외모 집착, 부담), 행복한 생활 그 자체(시기, 질투)와 같은 것들이 있을 것 같다.
기쁜 일이 기쁘지 아니할 수 있고 슬픈 일이 슬프지 아니할 수 있다는 인생의 커다란 모순. 이 모순 명제 자체가 삶을 관통하는 진리겠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모순의 양귀자 작가의 말을 허투루 흘려듣진 않은 듯하다. 물론, 작가의 부탁을 먼저 보고 읽은 게 아니라 게으름에 의해 천천히 읽은 것이긴 하지만, 그 의도대로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읽었더니 책 리뷰를 두 개나 쓰게 됐다. 지난 8월 초, 방콕행 비행기 안에서 작성했던 '감정 선택하기' 글에서 따온 깨달음을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언제나 그렇듯 ‘암’이 있으므로 ‘명’을 알아차릴 수 있고, 외부 자극(상황)과 무관하게 나의 내부는 별개의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