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외식을 한다는 서글픔보다 1인분으로 시킨 음식을 깨끗이 다 먹어내지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돈이 아까운 만큼, 지구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웬만하면 혼자 음식을 사 먹지 않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포장을 하고, 포장을 할 거 같으면 '용기(container)'를 챙겨 갔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지 않는 날들이 반복되었을 무렵부터는 간단히 집에서 먹을거리들을 챙겨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준비해온 간식을 다 먹고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바깥 음식을 사 먹을 요량으로 아예 준비를 안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체로 많은 날들 동안 집에서 기껏 싸간 간식들을 남겨오곤 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오늘은 챙겨간 간식들을 다 먹고, 바깥 음식도 더해서 사 먹었다. 오랜만에 도시락처럼 싸들고 간 주전부리들을 다 정리하고 빈 파우치를 정리하는 기분은 꽤나 뿌듯했다. 요 근래는 할 일들을 다 마치고 개운하고 보람찬 마음으로 집에 가는 날보다, 저녁 먹고 조금 더 해야 할 일들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막막하고 답답한 날들이 더 많았다. 작업 일정은 계속 늘어지고, 해야 할 일들은 자꾸만 추가가 되고, 해도 해도 헷갈리고 결과는 나오지 않는 날들이 3주째 연속이었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듯싶더니만 다시 주저앉고, 엎어지고, 그럼에도 해야 하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 와중에 빈 파우치를 보는 일이 그나마 나에게 '작고 확실한 행복'이 되어 주었다.
이번 일주일간 나의 낮 패턴은, 남편의 출근과 함께 집을 나서서 푸른 새벽 어스름이 하얀 아침 하늘로 바뀌는 동안 사무실에 도착하고 카페 문이 열기를 기다리며 한 편의 읽을거리를 마치는 거였다. 한 편의 읽은 거리가 늘어질 때는 카페 오픈 시간보다 두세 시간 늦게 자리를 뜰 때도 있었다. 머리가 뒤죽박죽이 될 때면 아직 다 끝내지 못한 글을 내려놓고 카페로 달려가 차가운 아이스 라테를 한잔 텀블러에 받아오고 싶었다. 그 충동을 꾹 참고 할 일을 하나 끝내고 보상처럼 짧은 산책과 라테를 한잔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기쁘고 설렜다. 건조한 사무실을 잠시나마 벗어난다는 기쁨과, 얼음으로 가득한 3샷짜리 라테의 진하고 고소한 맛을 맛본다는 설렘. 그렇게 라테 한잔을 다 마시고 나면 오후가 되었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작업 진도는 안 나가고 머리만 아팠다. 내일의 나에게 모든 것을 미루기에는 너무 많은 과거의 '나'가 일을 미뤄두었고,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었다. 일을 해낼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잠은 자고, 매일 샤워는 하고, 꼬박꼬박 밥은 챙겨 먹었고 저녁이 되면 남편이 퇴근을 했다. 남편은 퇴근을 하며 나를 pick-up해 갔고, 남편의 도착 시간을 마지노선으로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집엘 가면 저녁 미팅이 있는 날들이 와다다다 이어졌다.
저녁 미팅 전에 시간 여유가 되면 미리 급하게 밥을 먹었고, 미팅 전 할 일이 있거나 미팅 시간에 겨우 맞춰 집에 도착할 때에는 미팅이 다 끝난 밤에 뒤늦게 저녁을 먹었다. 남편과 나는 함께 저녁 먹은 뒤처리와 설거지를 하고 내일의 출근을 준비했다. 다음날 입을 옷이 마음에 들면 기분이 그나마 좋았기에, 매일 아침 선크림만 바르고 집을 나설지라도 당일에 입을 옷은 전날 밤 미리 세팅을 했다. 개인 정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나를 기다리다 남편은 먼저 잠이 들 때가 많았고, 아침잠 많은 나보다 먼저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남편이 부스럭거리는 낌새가 느껴지면 나도 후다닥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정말 피곤한 날은 옆에서 남편이 일어나든 출근을 하든, 내리 며칠을 침대에서 살곤 했지만 그렇게 침대에서 하루를 다 보내고 나면 그 며칠이 너무 허무했다. 그 기분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남편이 출근할 때 따라 길을 나서려고 용을 썼다. 혼자서 즐겁게 무언갈 할 스스로가 아닌 걸 확인했기에, 내가 무언갈 할 수밖에 없는 여건들을 스스로 조성해 주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성을 다하든 어찌저찌 대충 마무리 짓든, 그래도 무언가를 했고 결과물이 나오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결과물이 나오든 그렇지 않든, 성실하게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나'를 빚고 있는 중이다. 에릭 에릭슨은 엄마와 애착을 맺는 '신뢰-불신'에서부터 10살 무렵 '근면-열등감'을 갖게 된다고 하였는데 몇십 년이나 늦게 근면성을 길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