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없는 나날들, 별거 아닌 작고 귀여운 주전부리

by cheh

잠자리에서 잠이 깨고 난 다음부터를 하루의 시작이라고 보자면, 나의 어제는 그 전날 낮부터 시작한다. 그 전날 밤부터 전력투구를 하고 어째서인지 잠들지 못하고 출근을 하고 잠깐잠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 잠이 깼다. 그리곤 열심히 살다가 밤 12시 즈음에 '그동안 열심히 산 것'이 잘 되지 않았기에 자책과 함께 잠이 들고 잠에서 깼다. 바깥의 돈벌이를 열심히 하고 난 다음 집에 와서 TV를 멍하니 보는 것이 과거 수렵 사회의 불멍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냥의 긴장을 이완시키듯이, 생업의 시달림을 달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 과정이 유튜브 시청이었고, 몇 시간이고 침대에 누워 개그 프로그램이며 자기 계발 영상을 시청하다가 다시 저녁이 찾아왔다. 황사가 심한 하루였지만 오랫동안 쌓인 세탁물을 다 돌렸다. 수건 세탁과 일반 세탁을 하고, 세탁기에서 냄새가 스멀스멀 나는 듯하여, 락스를 풀고 통세척도 돌렸다. 황사는 내일 그친다고 하고, 오늘내일 날은 맑고 하여 빨래를 두 판 가득 돌렸다. 수건을 먼저 각 잡아 널고 한 시간 뒤 다음 빨래들을 널려고 보니, 따뜻한 볕에 벌써 빨래가 꽤 말라서 폭폭 삶은 빨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빨래집게가 모자를 정도로 촘촘히 널고 났는데도 뭔가 허하고 하기 싫은 맘.

어제저녁 생각해둔 열무김치 지짐을 한다. 멸치 국물을 조금 내다가, 열무김치를 넣고 바글바글 끓이다가 자작하게 졸이다 들기름을 잔뜩 넣고 불을 내렸다. 누구는 김치 속을 털어 넣으라 하고, 누구는 설탕을 안 넣고, 또 누구는 된장을 넣기도 했다. 하다 보니 김치찜이랑 유사해서 김치 찜하던 요령으로 김치 지짐을 해놓았다. 시큼하디 시큼해진 여름 김치를 다음 해 봄이 되어서야 다 먹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먹고 싶어서 들고 다니던 컵라면을 뜯어 열무 지짐과 함께 점심을 해결했다. 그래도 배가 고프다. 열무 지짐을 하는 동안 라면을 먹어, 말아 고민하면서 이미 아이스라테를 한잔 말아먹은 터였다. 시간은 점점 저녁 미팅 시각에 가까워지고 그럼에도 기운이 안 나서 결국 믹스 커피를 한잔 더 마셨다. 남편이 늦은 점심이자 이른 저녁을 먹고 난 자리에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내가 조금씩 먹다 남긴 탄수화물 주전부리들이 남아있었다. 남편은 혼자 베이컨 볶음밥을 만드는 짬짬이 침대에 누워만 있는 나를 체크하러 종종 다녀갔다. 그런 남편에게 나의 depressed 상태를 전달하고, 남편도 함께 그 기분에 동화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의 확인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짐짓 밝은 목소리 톤으로 으응, 하고 대답을 해주었다.

믹스 커피를 마신 뒤 줌 미팅 전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정리를 했다. 남편 옷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요리하고 난 설거지 거리들은 싱크대 안에 고스란히 놓여있다. 황사로 창문을 열지 못한 채 빨래를 말리고 있는 베란다는 얼마나 습한지 확인하고, 떨구어진 옷들은 가지런히 개켜서 의자에 얹어놓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설거지 거리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남편에게 물었다. 식기세척기 안에 왜 안 넣어두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이따가 저녁을 먹고 난 후 다시 할 거란다. 나의 저녁 미팅이 끝나면 9시인데 그때쯤 저녁을 먹어도 되려나 고민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지금의 설거지 거리도 작은 식세기 안에 꽉 차게 들어가기에 일단 한판 돌리기로 하고 공부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마의 종기도 결국 터트려 버렸다. 며칠간 두툼하게 올라오던 이마의 종기를 바늘로 일부러 흠집을 내어 짜냈다. 어째서인지 또다시 몸 여기저기에 염증이 돋았다. 나는 피곤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피곤하다고 신호를 보낸다. 처음 며칠은 무릎이 불편하다 좀 심해지면 몸 여기저기에 염증이 생긴다. 입술 안쪽 깊은 곳에도 입술 바로 안에도 염증이 생기고 더불어 모낭에도 염증이 생겼다.


이마 가운데 툭 튀어나온 단단했던 결절은 불그스름하고 만지면 살짝 아프다가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안쪽에 하얀 고름이 잡힌 것이 보였다. 완전히 곪아 저절로 터지기 전에 뾰족한 바늘로 살짝 찔러주고 양 손으로 종기 옆을 꾸욱 눌러줬다. 하얀 고름이 나왔으나 아픔이 가시질 않아서 계속 꾸욱 누르니 조금 더 깊이 있던 속고름이 나왔고 마침내 붉은 피가 나왔다. 짜내기 전에는 아프지 않았는데 오히려 짜내고 나니 아릿아릿하다. 남편이 알코올 솜으로 내 상처 부위를 닦아내고 약을 발라주었다. 별거 아닌 종기 하나에도 나를 챙기는 남편 덕분인지, 저녁 미팅이 끝나고 방향이 정해지고 할 일이 생겨서 그런지, 다시금 활기를 찾은 나. 엄마 집에 물을 뜨러 가면서 늦은 저녁으로 치킨을 사 가기로 했다. 치킨이라는 소리에 기뻐하는 남편과, 원체 치킨을 좋아하는 엄마와, 마침 세일하는 닭 덕분에 한 마리 만원으로 두 마리 치킨을 사들고 엄마 집을 방문했다. 엄마는 어제 광양에 봄꽃놀이를 다녀오며 산 휴게소 알밤 빵이 맛나다며 딸내미를 챙겨주었다. 귀여운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나를 챙기는 행동들이 내 마음을 소소하게 채워준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은 치킨 덕분인지 든든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업무에서의 작은 불화로 갉아먹힌 내 보잘것없는 멘탈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내 삶의 귀여움'덕분에 다시금 기운을 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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