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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Dec 07. 2024

눈 속에 갇히다

117년 만의 최대의 눈 폭탄이라고 하던가? S는 공부방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 눈이 소담스럽게 내렸다. 하지만 점점 걱정이 증폭되었다. 오늘 집에 무사히 운전하고 돌아갈 수 있으련가?  

    

눈은 가차 없이 마구마구 쌓여갔다. 10센티미터, 20센티미터.... 거의 50미터까지 쌓인 듯했다. 날씨마저 추워서 차가운 바람에 몸이 웅크려졌다. 길이 모두 아수라장이 되고 어느 도시에선가 53중 충돌이 일어났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길 포기했다. 공부방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밖에. 다음 날 오전에 나가보고 눈이 좀 녹았으면 집에 들렀다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도 역시 똑같은 상황... 눈 폭탄을 정면으로 맞은 거리는 아직 비실비실 휘청이며 회복의 기미가 없었다.      


마치 북극을 옮겨다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공포스러울 만큼 눈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이러다가 어느 날 지구 멸망의 날이 도래하는 거 아닐까? 영화에서만 보던 엄청난 재앙이 닥쳐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식량은 바닥나고 인류도 사라지는 날.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으나 생필품이 부족했다. 당장 하루를 더 보내려면 적당한 식사 거리도 있어야 하고 오후에 상담을 온다는 어머님도 있으니 샴푸, 로션 등 화장품도 사야 하고. 하룻밤 머리를 감지 못했는데 벌써 머리도 가렵고 바디 로션을 바르지 못한 몸도 건조하게 당겨왔다. 몸이 점점 마른오징어처럼 바짝 마른다.      


몇 가지 물품을 사러 사거리로 나섰다가 푹푹 빠지는 눈을 피하지 못해 신발이 젖고 말았다. 근처의 슈퍼마켓과 화장품 가게는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공부방 근처에 자주 가던 편의점으로 갔다.    

 

가게 캐노피 위의 눈을 쓸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맞아주셨다. S는 샌드위치, 햄버거, 냉동만두, 어묵 등등의 식량을 눈에 보이는 대로 쓰러 담고 샴푸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마음이 불안하면 낯선 이에게 털어놓게 된다.     

 

“어제 눈 때문에 집에 가지 못했거든요. 오늘 아침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운전을 못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공부방에 있어야겠어요. 혹시 로션 같은 것도 있나요? 아무것도 바를 게 없어서요.”     


“눈이 1 미터는 온 것 같아요. 아까 다른 여자분도 차를 빼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어요. 휴우. 로션 샘플 같은 것도 괜찮죠?” 아저씨는 S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여자들 바르는 걸’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단골이긴 하나 단지 몇만 원어치의 생필품을 샀을 뿐인데 샘플 화장품까지 챙겨주셔서 너무나 고마웠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냉장고에 먹을거리가 충분히 있으니 든든하다. 집 나온 사람이 되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놓여 약간 흥분도 되고 하룻밤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을 보냈는데 여전히 길은 꽁꽁 얼어붙었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이제 생필품도 구해놓았으니 하룻밤 더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집에 고생스럽게 다녀와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느 면에서는 놀러 온 기분도 났다. 평소 공부방은 개인 사무 공간이기도 하다. 집은 S에겐 휴식의 공간일 뿐이고 기분이 가라앉으면 근처 카페라도 나서서 기분을 전환한다. 카페도 가고 싶지 않은 날, 공부방은 S의 고독한 피난처이다. 일상을 떠날 수 있으면서도 다른 일에 집중이 가능한 반 공적인 공간.     


이틀을 먹고 자며 낯선 공부방에서 생활을 하니 펜션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S의 장점이라면 적응력이 좋다는 점.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떨어지는 흥분을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미지의 공간, 색다른 공기는 활력을 준다. 세상에 관한 호기심이 상승하면서 일상에 심드렁해진 정신에 활력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그래서 강제적이나 안정된 마음으로 공부방에서의 둘째 밤을 보내게 됐다.

가을과 겨울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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