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서 두 번째 바퀴벌레를 만났다. 이집에 이사 온 이후로 별일 없이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데 하나의 큰 애로 사항을 만났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바.퀴.벌.레.
바퀴벌레를 마주하니 오래전 옛 기억이 스믈 스믈 떠오른다. 어렸을 때 살았던 1980~90년대 아파트와 주택에는 바퀴벌레가 창궐했다. 그 시절에는 다들 집에 바퀴벌레 한 마리쯤은 있었을 것이다.
사실 한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가 보인다면 이미 바퀴벌레는 그 집을 점령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어느 날 꿈인지 생시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벽지를 뜯고 보니 그 뒤에 바퀴벌레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는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퀴벌레 끈끈이에 알을 낳으셔서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바퀴벌레들도 많이 목격하였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만 치부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이사를 와서 다시 바퀴벌레님을 조우하게 되었다. 얼마전 들르신 바퀴벌레님은 사이즈가 손가락 한마디만한 아담하신 분이어서 책으로 때려잡았다. 마침 위치도 손에 닿는 벽에 있어서 간단히 해결했다.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 있어서 바퀴벌레 약을 사놓으려다가 잊어버렸고.
그런데 오늘 다른 바퀴벌레님이 다시 예고도 없이 방문하셨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도 닿지 않을 천장에 가까운 곳에 등장하셔서 아주 천천히 집 구경을 하시는 중이었다.
'아이고 바퀴벌레느님, 여기는 속세를 떠나고 싶은 인간 한 명 밖에는 구경할 것도 없는 누추한 공간입니다요.'
몸체도 남다르게 크셔서 거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이셨다. 아마 미국에서 이민 오셨다는 미국 바퀴벌레님인 것 같다. 압도적인 신장 때문에 감히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아쉬운 대로 집에 있는 소독제를 뿌리니 기분이 상하셨는지 푸드덕 힘찬 날개 짓을 하시며 부엌 쪽으로 도망가셨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냉큼 옷을 주워 입었다. 밤 11시이지만 게으르신 몸을 일으켜 편의점에라도 가서 바퀴벌레님을 지옥으로 고이 보내드릴 약을 사와야 한다!
편의점에 들렀으나 바퀴벌레약이 없다고 하신다. 절망적이다. 하릴없이 불법주거 침입하신 바퀴벌레님에 대해서 평소 대화란 1도 없었던 편의점 아저씨에게 쏟아 놓았다. 이 동네에는 원래 바퀴벌레님이 서식하느냐?등등의 질문을 퍼부으면서. 바퀴벌레님의 웅장한 사이즈에 대해서 온 몬으로 설명하였다.
아저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남자들도 바퀴벌레는 싫어하나보다. 집주인님이 방역을 좀 해주셔야 하는게 아니냐 등등. 어쩌라고 아저씨에게 털어놓느냐 말이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주저리주저리 하며 마음에 안정을 가져오려 노력하였다.
내일 가서 다시 바퀴벌레님을 보내드릴 약을 사와야겠다. 2021년 집에 바퀴벌레님이 다시 방문하실 줄이야.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계실 줄이야.
세상 벌레들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데 바퀴벌레님은 정말 지존이시다. 왜 자유롭고 광활한 풀숲에서 다른 벌레 친구님들과 즐겁게 사시지 않고 인간이 살고 있는 집으로 기어 들어오시는지 모르겠다. 인연이 아니면 악연만 될 뿐이다.
'이 몸은 날마다 도를 닦으며 사는지라 살생도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자꾸 출몰하시면 방법이 없습니다. 도가 부족하여 눈도 깜빡하지 않고 때려잡는 사람입니다. 여자로 태어났사오나 태생이 애교라고는 없습니다. '
때려 잡혀 운명을 달리하실 날이 멀지 않는데 왜 우리집에 함부로 방문하셨습니까? 인간 세상 무엇 구경할 것이 그리 많다고 그러십니까? 속세를 떠나십시오.
내 한때는 벌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았던 몸이다. 방충복 하나 입고 벌통 사이를 마구 쏘다녔는데 바퀴벌레님 한분의 등장으로 가슴이 떨리다니 자존심이 상하는구려. 벌은 벌이고 바퀴벌레는 바퀴벌레다. 벌은 무단으로 남의 집을 점거하지는 않으신다. 문을 열면 언제라도 순순히 나가시는 의식이 있는 분. 바퀴벌레는 정말 바퀴벌레 같은 분이다. 무언가 음흉하고 느물느물하고 뻔뻔하고 예의가 없으신 분이다. 쏘이지만 않으면 벌이 백번 낫다.
제발 자는 데 내 곁으로 오셔서 잘 자고 있나 확인이나 안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꿀잠을 자고 있으니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바퀴벌레님이 슥슥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오시면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습니다요.
나름 예민한 인간이라고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성깔도 있는 편입니다.
일년에 한 두번 밖에 안 나오는 대찬 성깔을 한번 제대로 맛보실렵니까?
먼 길 배웅하지 않겠으니 그만 돌아가소서.
고양이야 혹시 바퀴벌레 잡을 수 있니?
미국바퀴벌레님의 명복을빕니다. 제가 그리 부탁드렸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