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이유

잔소리는 일진광풍

by 서사임당


엄마로 살다 보면 책에서 배우고 익힌 것과 다르게 한 템포 쉬거나 ‘아, 그렇구나’ 인정하기보다 내 생각이 담긴 말이 먼저 앞설 때가 많다. 그렇게 내뱉고 나면 ‘에이,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걸...’ 하고 후회가 밀려들지만 상황이 닥치면 또 어쩔 수가 없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반성의 연속이어서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것이 많고 몇 번을 잘해주어도 한 번 다그치면 엄마는 미운 사람이 되고 만다. 어쩔 수 없다. 1학년 겨울방학 일기에서 아이의 글을 보고 한참이나 웃은 적이 있다.




근래 2~3년 동안 나는 계속 긴 머리였다. 웨이브를 주었다가 생머리로 폈다가 염색으로 색깔이 몇 번 달라지긴 했지만 늘 비슷한 갈색 긴 머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턱선 위로 머리를 자른 날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많이 자르고 돌아오니 좀 이상한 모양이었다.


“우리 엄마가 왜 갑자기 머리를 짤라쓰까? 긴 머리는 이모를 달만는데 짧은 머리는 아이류를 달맛다. 아이유보다 엄마가 더 예쁘다.”


이 문장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제 눈에 이모랑 비슷하던 엄마에서 아이유라니, 머리 자르니까 더 이뻐 보이는가 하고 좋아서 물었다.


“엄마가 왜 아이유를 닮았어?”


“엄마, 그 노래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엄마는 아이유처럼 잔소리를 잘하잖아! ”


그래도 아이유보다 내가 예쁘다니 얼굴만 예쁜 아이유보다 밥도 주고 사랑도 주는 엄마가 좋은 게지?



그 이후로도 나는 플레이 리스트에 <아이유의 잔소리>를 맨 위에 올려두고 매일같이 반복 재생을 했던 것 같다. 안 해야지 하면서도 목소리를 더 크게 하느냐 작게 하느냐, 짜증을 많이 묻어내느냐 조금 섞었느냐 그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 몸에 익혀 자연스럽게 건네고 싶은 ‘나 전달법’은 정말 나만의 전달법이 되어갔다. 문장의 끝은 청유형에서 결국 명령형이 되고 만다. 다 널 위한 소리는 속상하게도 늘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





지난 토요일이었다. 봄을 시샘하듯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에 바람이 몹시 불었던 날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해수어를 보고 싶다고 했다. 나비고기와 같은 열대 해수어를 보고 싶다고 했다. 무료입장 가능한 고성 생태 학습관에 갔으나 코로나로 인해 휴관 중이었다. 본인의 뜻대로 물고기를 볼 수 없어 아쉬워하기에 고성 시장에 가서 수족관에 있는 활어들을 보여주었는데 영 탐탁지 않아했다. 털게나 개불, 낚지 등에 살짝 관심을 갖는가 싶더니 이내 지루해하며 다시 수산과학관으로 가자고 했다. 뿌루퉁한 아이를 달래 시장 윗 골목 공룡벽화가 가득했던 시니길을 걸었고 꽈배기를 한 봉지 가득 사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중간에 기억은 약간 필름이 끊긴 듯하다. 나는 일진광풍같은 잔소리를 뱉은 기억이 없는데 아이의 기억 속 글에는 이런 엄마가 남았다. 애석하다. 내 마음에도 내 말에도 봄바람이 피어나길 바란다. 만약 이 글을 담지 않았더라면 다시 한번 이 주제로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잔소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반성을 통한 더 나은 엄마가 되는 과정이라 믿으며, 오늘 밤도 내일 아침에 덜 잔소리하는 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