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을 잃었으면 그만인가요. 우리는 아닌데요.
어릴 때부터 친할머니에 얽힌 추억들을 세상 따뜻하게 말해주는 친구들을 보면 늘 신기했다. 내가 기억하는 ‘친할머니’라는 존재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렸을 때 이미 돌아가셔서 나에겐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그리고 친할아버지가 전부였던 유년기.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 곁에는 늘 외할머니가 있었다. 차가운 친할머니와 비교해 정 넘치는 외할머니가 있어서 참 따뜻했던 기억이 많다. 맞벌이 가정이었던 우리 집에도 자주 오시고 이런저런 음식들도 맛있게 해 주시고 늘 외할머니랑 함께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꽤나 오래 살아계셔서 돌아가시기 전 모습도 지켜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초등학교까지는 친할아버지도 살아계셨는데 그리 살가우신 분은 아니었지만 과묵함 속에 숨겨진 작은 다정함이 묻어나는 분이셨다. 가끔은 이런 분이 왜 친할머니와 결혼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애정표현을 많이 하시는 타입은 아니셨으나 은근하게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시는 모습이 멋모르는 어린 시절에도 고맙게 느꼈었는지 희미하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친할아버지는 워낙에 내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장례식 때 또래 친척들과 모여 장난치기 바빴던 철없는 모습 속에서 마지막 가는 길을 보내드렸다. 그날은 우리 아빠가 많이 울었고 아빠의 처음 보는 그런 모습이 낯설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던 기억뿐. 어른들이 울 때 같이 울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마음으로 눈물을 몇 방울 훔쳤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너무도 잘 지내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치매에 걸린 친할머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몇 번 목격한 후에 증세가 더 심해지셔서 결국 요양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난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친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3년 전쯤이다. 사실 찾아뵈려면 언제든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거리의 요양원에서 오래 지내셨다. 사람을 알아보는 건 당연히 불가능, 대화는 오래전부터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영양공급도 코에 호스를 껴서 진행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게 친할머니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어떤 의미일지 종종 생각했다.
고모들과 부모님은 명절 때라든지 연휴가 생기면 찾아뵌다. 아무도 나에게 친할머니를 찾아뵈라고 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 부모님이 찾아갈 때 같이 갔던 시기 이후로는 자발적으로 간 적은 없다. 그땐 부모님이 가면 함께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이유가 있었지만 결혼하고 독립한 나는 더 이상 친할머니를 보러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남들이 들으면 무척 냉정한 손녀구나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친할머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고 치매가 걸리기 전 늘 우리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던 모습과 고모들의 자식들만 편애했고 돈은 많았지만 베풀지는 않는 다소 늙은 여우 같은 이미지로 기억한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던 아빠와 고졸이지만 열심히 공부해 공무원이 된 엄마의 결혼. 친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좋아하지 않게 된 시작은 거기서부터였을까? 뭐든 자기 아들이 아까운 마음에서. 아니면 외아들인 아빠 아래로 고모가 셋인 남매인데 고모들에게는 다 있는 그 흔한 아들이 정작 대를 이어야 할 아들에게만 없는 것도 며느리를 탓하고 미워하는 데 한몫했을까? 출산이 힘들었던 엄마는 셋째가 아들이란 보장 없이 더 이상 또 애를 낳고 키우긴 무리라고 판단해 딸 둘로 끝냈는데, 엄마 탓 만으로 태어난 것도 아닌, 아들이 아닌 딸인 우리가 친할머니는 그토록 원망스러웠을까? 미운털의 시작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결혼 후 시집살이를 시작하며 엄마에게 일은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라고 시킨 시어머니(친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어린 나이에 노력해 얻은 직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동안은 아빠의 벌이로 어느 정도 유복하게 지냈지만 대한민국이 휘청할 때 역시나 우리 집에도 어려움은 찾아왔고 잘 나가던 아빠의 몰락에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건 친할머니의 자식인 잘난 아빠가 아닌 전적으로 엄마였음에도(아빠는 무너졌고 다시 일할 힘을 잃었다. 그때의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 같다. 경단녀로 큰돈을 벌진 못했어도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친할머니는 한 번도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이 없다. 마치 당해보란 듯이 방치했다. 결국 나의 유년기는 가난과 불화로 우울했던 날들이 많았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경제적인 도움을 줄 의무가 없음은 이해하지만, 남 부러울 것 없이 부자로 살던 친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딸들이자 첫 손녀들에게 그 시절 너무나 매정하지 않았나 싶다. 그놈의 돈 때문에 학창 시절 급식비 한 번을 제대로 낸 적이 없었는데도 친할머니는 그러니까 너희 엄마 아빠가 더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하며 냉정하게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이 늙은 친할머니의 손녀가 맞긴 맞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는 무수한 밤들을 보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고 우리 집의 경제적 여력도 차츰 회복하며 화목함을 찾아갔지만 정말로 힘들 때 나몰라라 했던 친할머니의 모습들은 여전히 선명히 기억한다.
보통 할머니라고 하면 친할머니를 일컫고 외할머니는 ‘외’ 자를 붙이는 게 일반적인데 간결하고 대표성을 띄는 그냥 할머니라고 불리는 대상이 왜 친할머니일까 한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그저 할머니는 친할머니가 아닌 외할머니인데 말이지 하면서 말이다. 할머니 같은 건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왜 양쪽의 할머니를 둘씩이나 만들어서는 ‘할머니’라는 단어 자체를 깎아내리는지 왜 혼란스럽게 하는 거냐며 속으로 홀로 투정하며 삭힌 적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의 치매 진단은 내겐 너무나 속 시원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생전 우리 집 근처에도 잘 오지 않았던 친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한밤중에 우리 집에 찾아왔다.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우리 집을 헤맸다고 하며 그 시간에 왜 찾아왔는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만 하다 갔는데 아마 그게 내가 기억하는 치매가 처음 시작된 친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고모와 부모님도 빠르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각해져 드라마 속에 나오는 치매 환자의 모습처럼 친할머니는 나를 보며 막내딸이 아니냐며 언제 이렇게 컸냐며(내가 막내 고모와 닮아서인지) 따뜻한 웃음을 보이는 등 전형적으로 기억을 잃어갔고 점점 상황은 악화되었다. 친할머니의 모습에 아빠와 고모들은 서글퍼했지만 나는 안타깝거나 슬프다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식도 못 알아보고 이젠 아예 말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친할머니에 대한 나의 미움이 아직 그대로인지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날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했던 지난 행동들도 돌아보게 되고 그런다는데 친할머니가 혹여나 우리 엄마나 나와 동생에게 미안함을 갖거나 그런 적이 있을까? 위안도 해보며. 하지만 그녀에 대한 미움을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다. “당신은 맘 편하게 모든 기억을 잃으면 그만이지 않나요? 세상 참 편하게 사시네요 끝까지. 우리는 다 기억하거든요.” 하는 마음으로 귀결되었다.
벌써 친할머니가 요양병원에서 지낸 지 어언 10년이 넘어간다. 혈육을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버려보고자, 그녀를 이해해 보고자 쓰기 시작한 글인데 반성은커녕 결국 아직도 나는 친할머니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또다시 받아들이고 말다니. 나에겐 친할머니라는 존재를 되려 잊고싶은 허탈한 밤이다.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여린 소녀에게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까진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