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왜 그래? 그러지 좀 마 아니야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미안
엄마라는 존재. 내겐 이름만 떠올려도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사랑하고 소중하고 고맙고 미안하고 이런 건 다 알겠는데, 어째서 엄마와 함께 몇 시간만 함께 있어도 다투기 일쑤인 건지. “남들도 다 이럴까 아니야 이 정도는 아닐 거야, 모녀관계가 정말이지 이럴 순 없잖아. 문제는 나에게 있나?” 그래 한동안은 모든 원인을 나에게서 찾기도 했었지만 그렇다면 나의 노력에 따라 상황이 나아져야 정상인데, 언제나 번복 또 번복이다.
좋다가 울컥하다가 미친 듯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다가 다시 잘해보자 다짐하다가 미안하다가 고마움으로 그리고 익숙함으로 그러려니로 마무리되는 이 관계. 아무리 반성의 반성을 거듭하고 개선을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해봐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 같은 관계. 어찌 보면 내 인생에서 이 문제는 영영 끝나지 않을 숙제 같다.
엄마는 늘 딸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말한다. 내 나이 서른다섯,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음에도. 하지만 나도 안다. 엄마라는 존재의 눈에는 다 큰 자녀라도 언제나 아이 같고 하염없는 걱정뿐이라는 걸. 챙기고 챙겨도 또 부족한 마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나도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 진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아직 갈길이 멀었으니 말이다. 나 자신도 참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엄마는 나를 걱정하는 것일 뿐인데 나는 그 걱정이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는 사실이다. 공감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나 같은 딸을 30년 넘게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아직도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바라는 엄마가 답답하기도 하고, 보여 지기 식 친절이야 언제든 베풀 수 있지만 그런 거 말고 진심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에 비해 나의 행동은 수줍고 어색하고 어설프기만 하다. 그리고 그 따뜻한 말 한마디 그까짓 것을 나는 왜 그렇게 내뱉지 못하는 건지도.. 왜 나는 진심으로 엄마를 사랑하면서도(정확히 말하면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매 순간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 (진심이 자꾸만 숨어든다 라는 표현이 맞으려나) 허공에 겉도는 말들로 상처 주고 그만큼 아파하는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나중에 내가 엄마 정도의 삶을 살았을 때 그제야 아 그때의 마음이 이거였구나 깨달을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내게 가볍게 던지는 농담 하나도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민하고 진지하게 받아치는가 하면 세상 냉철하고 냉정한 수학자처럼 엄마의 말에 반박하고 비판하려 따지고 재고 든다. 나는 정말 이 나이에 10대에도 없던 사춘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인가 한심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남들처럼 다정하고 친근하게 엄마와의 관계를 바꾸고 싶다는 갈망을 하는 것이 참 모순적인 것.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데 매번 까먹고 되새겨도 되새겨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명제. 엄마라는 인간도 상처 받기 쉬운 사람이다, 라는 사실. 아무리 모질게 대해도 딸이라는 이유로 이해하고 덮어주어서 상처에 무디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철없는 딸이라는 작자.
엄마에게만 떼를 쓰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순둥순둥한 모습을 보이는 여우 같은 아들에게 내가 ‘야 아들아, 넌 엄마만 우습니?’라고 장난 삼아 말했는데 그 말을 하고 갑자기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도 이런 마음일까? 내 엄마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아,라는 생각으로 엄마를 정말이지 우습게 보았는지도. 순간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오늘도 다시 잘해보자 다짐하고 다시 싸우고 다시 사과하고 미안한 마음에 고마운 마음에 눈물 흘리고 내일이면 또다시 짜증 섞인 말들을 생각 없이 내뱉을 게 뻔한 내 자신을 혐오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탈한 모녀관계처럼 보이고 싶어 연기한 수많은 보여주기 식 관계 가면을 이제는 벗고 싶다. 엄마에게 상냥하게 대하자는 마음을 버리고 엄마를 그냥 오늘 처음 만난 제삼자로 생각하는 편이 그녀를 위해 더 친절함을 베푸는 방법일 것만 같다. 나라는 작자는 평생 엄마에게 잘할 수 있을까? 후회는 그만하고 엄마의 엄마가 되어주는 상상을 한다. 엄마 부디 내 자식이 되어 나를 우습게 여겨줘 그래도 난 다 이해할게, 하고 보듬어주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