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는 가능할까 아빠를 인정하는 일
어릴 때부터 아빠는 나를 ‘꼴통’이라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이니까 벌써 이 소리를 들은 지도 20년이 넘어가는 셈이다. 하는 짓이 똑똑지 못하고 별나다는 이유가 시작이었는데 남들이 있건 말건 나를 저렇게 불러대는 턱에 처음엔 말 못 할 부끄러움도 많았다. 이젠 그마저도 익숙해져 버렸지만. 나는 내가 꼴통인 이유가 아마도 아빠 때문일 거라고 종종 생각한다. 어린 내가 못나면 얼마나 못났길래 이런 별명으로 불러댔는지 나의 아빠라는 작자도 알만하다.
호랑이처럼 무섭던 시절이 아빠에게도 존재했는데 첫 기억은 유치원 때. 퇴근해서 몹시 시장한 아빠에게 엄마가 저녁상을 내왔을 때였다. 알레르기 비염이 있던 나는 늘 코막힘과 재채기를 달고 살았는데 아빠가 첫 술을 뜨기 전에 나의 눈치 없는 재채기는 터져버렸고 그날 아빠의 노발대발한 모습을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한다. 항상 짜증 섞인 말투와 신경질적인 윽박지름, 인상을 자주 써서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인 아빠의 얼굴은 그의 존재를 인지할 때나 떠올릴 때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박힌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다. 나이가 들고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지 친할머니의 모습을 진하게 닮아가는 환갑이 된 지금 아빠의 얼굴은 사뭇 낯설다.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빠의 불같은 모습을 나는 늘 두려워하였고 한창 젊음을 즐겨야 할 나이에도 아빠가 정한 통금 시간에 제깍 제깍 귀가하던 나는 겁쟁이 딸이었다. 내가 나를 놔버리고 이젠 독립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아마도 20대 후반 언저리)에야 내 맘대로 살긴 했지만 그전까지 아빠의 엄포에 순순히 따르며 부모가 하지 말라는 규칙은 최대한 어기지 않고 아빠가 혹여 화가 날만한 일은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일지라도 참았더랬다.
나는 그토록 순순한 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컸는지 아빠의 모든 말에 반항하고 싶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뒤늦은 사춘기였을까. 아빠가 뭘 말하면 토 달고 비난하기 일쑤였고 나는 어느 순간 날카롭고 냉정하고 쌀쌀맞은 딸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동안 아빠가 부른 꼴통이라는 소리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어!라고 원망하듯 속으로 무한히 탓하며 작은 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꼭 고성이 오가야 아빠가 먼저 꼬리를 내려야 우리의 싸움은 끝이 났다. 아빠도 언젠가부턴 빽빽 소리 지르는 대신 체념하고 포기하게 되는 시점이 왔고 나는 이제야 내가 빼앗긴 자유를 드디어 되찾았다는 안도와 함께 아빠를 억누르고 이겼다는 우월한 감정에 사로잡힌 철없는 작자로 살았다.
결혼을 하고 난 최근까지도 아빠의 답답하고 쓸데없는 고집과 꽉 막힌 소통 능력과 자상함이라곤 찾을 수 없는 모습에 늘 분노한다. 결혼 전 처음 만난 시아버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는데 마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전형적이며 이상적인 몹시도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런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마음은 더 배배 꼬여 친아빠의 까칠한 모습을 더욱 비난하며 비교했다. 시아버지와 함께한 남편의 유년기를 가끔 들어보면 시아버지 역시 어떤 시절엔 아주 무서웠고 늘 대면 대면한 아들과 아버지 사이로 긴 시간 보낸 기억이 지배적이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내가 만난 시아버지의 이야기라고는 상상되지 않을 만큼 변화하신 모습에 나는 적지 않은 쇼크를 받았었나 보다.
내게도 다정한 아빠가 있었다면? 내가 의지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존재의 아빠가 내 곁에 있었다면 내가 이리도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고 예민한 성향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런 피해망상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으니 생각을 멈춘다. 내 인생은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고 이런 나의 모습도 결국엔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 미화된 것일지 몰라도 우리 집은 어려운 경제적 생활에도 대체적으로 재밌고 화목한 편이었으니까 누구의 탓도 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야 본론이자 곧 결론인 내가 아빠에게 화가 나는 이유에 대해 쓸 텐데, 아빠는 나이에 맞지 않게 철이 없고 엄마에게 막 대하며 집안에서 친절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면서 집 밖에서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까운 가족일수록 더 중요한 민폐나 매너에 대한 기본 상식과 교육이 절실히 필요해 보일 정도로 느낀 적도 상당히 많았다. 아빠를 인정하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때 아빠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너무도 서툰 사람이라 속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엇나가곤 하는 걸 거야,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그랬겠지, 아직도 아빠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겠지 생각하며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새 아빠는 환갑, 나는 조금 있으면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된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이 든다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놀랍다. 무언가를 깨닫고 제대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도 짧잖아! 하며. 정작 모든 걸 깨닫고 성숙한 상태가 되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남을는지 가끔은 비통하다.
정말이지 인정하기 싫은 한 가지는 내가 그렇게도 인정할 수 없고 이해불가였던 아빠의 모습을 내게서 자주 발견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것에도 굉장히 불만이 많은 모습이라든가, 열등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주변을 탓하기 일쑤인 모습이라든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계속된 실패나 좌절의 경험들이 만든 경계심과 의심들이 쌓여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굳어버린 돌 같은 마음 같은 것들. 그래서 주변에 남는 사람이 점차 사라지고 독단적이 되어가고 그렇게 긴 시간이 축적되고 그러다 보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가족뿐이게 되는데 더 마음 쓰고 보듬어야 할 가족에게 오히려 더 베풀지 못하고 감정을 풀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되어버리고 마는 것. 그래, 돌고 돌아 알게 되었지만 아빠는 외로운 것이었다. 외로움이 아빠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아빠를 보듬고 마음 쓰기에 이미 늦은 듯한 나는 이미 더 돌 같은 사람으로 변모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량이란 그릇은 없는 작자이다. 나 하나 감당하기에도 내 코가 석자인 것이다.
그저 먼발치에서 이렇게 글로 끄적이는 것으로 후일을 도모하고 기원해보는 일이라도 시도해본다. 언젠가 내게 마음의 여유란 것이 생겨 아빠에게 먼저 손을 뻗을 그날까지 부디 아빠가 더 단단한 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빠의 외로움에 쉬이 동참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작자. 여전히 나는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