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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06. 2020

스웨덴

King이고 싶었던 Queen :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바사가문의 문장



크리스티나는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았던 인물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딸이었습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것은 복잡한 스웨덴 사정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근대적 국가로써 스웨덴이 강하게 독자성을 가지게 되는 시기는 아마도 바사 가문이 스웨덴을 통치한 시기 이후일듯합니다. 바사 가문이 스웨덴을 통치하게된 상황은 복잡한 스웨덴과 북유럽 상황이 포함되게 됩니다. 15세기경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는 복잡한 상황을 거쳐 한명의 군주가 세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칼마르 동맹이라고 불리는 시기였습니다. 칼마르 동맹의 첫번째 군주는 덴마크의 공주이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였던 마르그레테(마르그레타) 여왕이었습니다. 세나라의 왕위계승자가 바닥나면서 결국 마르그레테 여왕이 독립된 세나라를 통치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기 스웨덴은 좀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는데 필요에 의해서 칼마르 동맹을 형성했었는데 스웨덴을 통치하는 왕가는 사실상 덴마크 왕가였으며 이런 상황은 스웨덴 사람들이 "외국인 국왕"이 스웨덴을 통치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덴마크쪽 국왕들이 스웨덴에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상황으로 비춰지게 되면서 스웨덴에서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전개 됩니다. 그리고 결국 구스타프 바사를 중심으로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 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구스타프 바사의 스톡홀름 입성



독립이후 구스타프 바사는 귀족들에 추대로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1세가 됩니다. 바사가문은 14세기에 형성된 스웨덴의 귀족가문으로 특히 구스타프 바사의 할머니가 스투레 가문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칼마르 동맹시기 스웨덴의 독립운동의 핵심가문이 스투레 가문이었으며 구스타프 바사 역시 스투레 가문과 친척관계로 스웨덴의 왕위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바사, 스웨덴의 구스타프 1세



구스타프 1세는 여러 아들을 뒀는데 장남은 에릭 13세가 되었고 둘째아들은 요한 3세가 됩니다. 그리고 막내아들은 칼 9세가 되죠. 세아들이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만큼 스웨덴의 정치 상황이 복잡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1세가 사망한뒤 에릭 13세와 이복동생들인 핀란드 공작 요한과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불화를 겪게됩니다. 특히 에릭 13세는 폴란드 공주와 결혼한 요한을 견제했으며 이런 상황은 에릭 13세가 요한을 성에 연금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에릭 13세는 귀족들의 신망을 잃는 행동을 했으며 결국 에릭 13세의 동생인 요한은 형을 몰아내고 스웨덴의 국왕 요한 3세가 됩니다.


스웨덴의 요한 3세



요한 3세는 폴란드 공주인 카타리나 야겔로니카와 결혼했는데 둘의 외아들인 시기스문드는 외가의 혈통덕분에 폴란드의 국왕 "지그문트 3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문제는 당시 스웨덴은 "신교"를 매개로 해서 국가를 통합하려 하고 있었는데 요한 3세의 첫번재 아내인 카타리나와 그녀의 아들인 시기스문드는 스웨덴에 가톨릭 세력을 확장하려는데 기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시기스문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웨덴의 국왕이 되면서 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스웨덴 귀족들이 보기에 시기스문드는 "외국 국왕"이었으며 칼마르 동맹시기 이후 외국 국왕의 통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던 귀족들은 시기스문드에 대해서도 곱지 않게 보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시기스문드의 가톨릭 옹호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물론 시기스문드는 정당한 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스웨덴을 내분 시키게 되는데 시기스문드의 숙부이자 요한 3세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시기스문드를 반대하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결국 스웨덴의  국왕이 됩니다. 그가 바로 칼 9세로 크리스티나의 할아버지였습니다.


스웨덴의 시기스문드,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


칼 9세의 즉위는 스웨덴을 분열시키게 만들었는데 비록 칼 9세가 신교를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며 스웨덴 국내의 인물이었지만 시기스문드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스웨덴의 국왕이었기에 귀족들은 지지하는 사람에 따라 서로 나뉘었으며 이런 상황은 칼 9세가 자신의 반대파에 대해 "피의 숙청"을 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칼 9세의 숙청은 스웨덴을 더욱더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적들에 둘러쌓인 스웨덴에 어려운 상황을만들게 됩니다. 폴란드와 폴란드 주변 국가들은 폴란드의 국왕 지그문트 3세를 지지해서 스웨덴을 적대시했으며 당대 폴란드는 유럽 최강국중 하나였기에 스웨덴은 어려움이 컸습니다. 게다가 숙적이었던 덴마크도 빼놓을수 없었죠. 덴마크는 노르웨이와 연합왕국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와도 적대관계였었습니다.   



스웨덴의 칼 9세,크리스티나의 할아버지


칼 9세 시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내부 분열과 외부의 침략을 동시에 겪게 되는 시기였었죠. 게다가 칼 9세는 아들이 성년이 되기 직전, 그것도 덴마크와의 전쟁중에 병사합니다. 전쟁중 국왕의 죽음과 미성년 국왕의 즉위는 스웨덴에 큰 고난중 하나가 됩니다. 결국 덴마크와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배상금을 엄청나게 지급하는등의 불리한 조건을 수용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칼 9세의 아들이자 크리스티나 여왕의 아버지였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스웨덴에서 "대왕"의 칭호가 붙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근대 유럽 전쟁사에 큰 획을 그은 군인일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내정까지 잘했던 뛰어난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매우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으며 사람들을 포용할줄 알았고 적앞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용맹스러운 군인이기도 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무너져가던 스웨덴은 당대 강국중 하나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었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라틴어식 이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즉위할 당시 스웨덴은 유럽의 강국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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