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에서 : 시아버지와 남편의 갈등
카롤리네의 결혼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바로 천연두에 걸려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을 돌본것일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카롤리네의 삶은 다른 왕족 여성들처럼 여러가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특히 이 문제의 중심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불화였습니다.
카롤리네가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불화일것입니다. 시아버지는 늘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었으며, 카롤리네의 남편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버지인 선제후쪽의 잘못이 더 커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제후는 아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길 원했을뿐만 아니라 아들이 하는 일에 불만이 가득했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선제후가 자신의 아들에게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카롤리네의 남편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트는 선제후의 유일한 아들로 선제후령의 상속자였을뿐만 아니라 영국의 왕위마저 물려받을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선제후는 자신이 노력해서 이만큼 이룬 나라를 아들이 망칠까봐 걱정이었으며 이런 걱정은 아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 내지 과도한 걱정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제후의 심리 상태는 결국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흡족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물론 카롤리네의 남편이 어렸을 때는 비록 불만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말에 늘 복종해야했지만 그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으며 역시 아버지처럼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할수 있게 되면서 점차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부자 사이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1708년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으며 이것은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말보러 공작 존 처칠이 그에게 호의적인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영국쪽에서는 훗날 자신들의 국왕이 될수도 있는 게오르그 아우구스트에게 호의적이 되었으며 훈장을 수여하려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아버지인 선제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왕위계승문제가 민감했기에 영국의 정치에 관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했던 선제후에게 이것은 영국의 정치와 연결될수 있다고 여긴것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아들에 대해서 칭찬한마디하지 않고 질책만 하던 선제후의 평소 모습을 비춰봤을때 아들이 잘한 일이라도 아들에게 인색했기 때문이라 여길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게오르그 아우구스트는 아버지의 이런 행동에 화가났을 것입니다.
이런 갈등에 대해서 카롤리네는 손을 전혀 쓸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물론 며느리에게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와도 그다지 다정한 모습이아니었던 선제후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카롤리네가 이후 시할머니인 조피와 함께 남편을 차라리 영국쪽으로 가게 하려고 노력했던 원인중 하나일 것입니다.
카롤리네는 첫 아들인 프리드리히 루드비히를 낳은 뒤 계속해서 세명의 딸인 안나, 아말리, 카롤리네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또다른 손자를 바라던 하노버의 선제후의 마음에 그다지 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루드비히는 연약했기에 아마도 선제후는 더욱더 다른 손자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손녀들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선제후는 실망스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실망스러움은 다시 한번 못마땅한 아들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딸들의 탄생에 대해서 카롤리네의 남편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트 역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당대 평범한 가부장적 남성이었으며 당연히 아들을 원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롤리네는 딸들을 잘 돌봤으며 아마도 자신이 프로이센 왕비에게 배웠던 것처럼 딸들의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카롤리네는 이런 남편과 시아버지의 갈등속에서 어떻게든 남편에게 도움이 되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장 큰 원인은 카롤리네의 시할머니인 팔츠의 조피가 영국의 왕위계승자였지만 영국 내에서 조피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원치 않는 사람들이 존재했었으며 이것은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치적 갈등은 하노버에까지 영향을 줬던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