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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진섭 Sep 13. 2015

진정한 의미의 위로

가장 큰 위로는 공감과 자기 확신에 있다

누구에게나 위로는 필요하다.

아마 사람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고, 내 편이었으면 하는 마음들이 한 번씩 나를 찾아올 때가 있다.

하루의 근무를 마치고 나면 노곤하다 못해 피로가 가득하여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고, 내 기분은 이러했고, 누가 나에게 이렇게 했다며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투정 부리듯 행동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번 한 주는 유난히 고된 한 주였던 것 같다. 잠도 잘 못 잤고 일은 일대로 많았고 안 하던 실수들까지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다 달았다. 나는 힘든 티를 겉으로 잘 내지 않는 편인데 같이 근무하는 부장님께서 내 얼굴을 보시곤 얼굴이 왜 그리 수척해졌냐며 걱정을 하신다. 

표정관리가 안됬던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곤 씩 웃으며 "잠이 좀 부족했나 봐요." 하고 애써 넘겼지만 힘이 든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어제 하루 종일 잠만 잤던 것 같다. 휴대폰도 무음으로 해놓고 커튼도 쳐놓고 마치 내 방은 하루 종일 한 밤 중인 것처럼 계속 누워있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기운을 차렸던 것 같다. 한 주 간의 피로가 고되긴 했던 것 같다. 


잠에서 깬 뒤에 커피를 한 잔 타 놓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 자판을 누르려던 순간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군가 싶어 보니 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의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간만의 연락에 반가워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잠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목소리는 밝았지만 유난히 지쳐있는 기색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타지에서 마음을 나눌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나 또한 경험해봤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냥 들어주는 것 밖에는. 그 친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 친구를 위로해주려는 내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내가 그 친구로부터 많은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힘든 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 친구의 모습으로부터 내가 에너지를 얻고 더 기운을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으로부터 사람은 위로를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위로?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하는데에 있어 서툴다. 나 또한 그러하다.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가끔 고민을 토로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반응은 대부분 같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지. 그걸 고민이라고 하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결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고민과 문제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는 해결방법을 묻는 것이 아닌 내 말을 들어달라는 호소이다. 해결방법은 알고 있는데 내 말을 듣는 이들은 들으려 하질 않는다. 말한 것이 후회될 만큼 오히려 더 답답해진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역지사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은지, 얼마나 힘이 들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것이다. 즉, 공감(Empathy)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공감을 하고 난 뒤에는 상대의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내 마음 또한 상대가 느끼는 마음을 같이 느끼게 된다. 상대가 슬픈 마음일 때는 같이 울어주고, 기쁜 마음일 때는 활짝 미소를 지어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다. 

반면에, 동정(Sympathy)은 이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공감과 비슷하기는 하나 결정적으로 차이가 하나 있다. 어떤 이의 마음을 동정한다는 것은 내가 그 상대의 마음에, 감정에 빠져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연민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상대의 문제를 내 문제로 만들어 버려 내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말을 들어줄 때는 신중해야 한다. 내가 지금 공감을 하고 있는지, 동정을 하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너무 비슷한 모습이기 때문에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동정하는 마음으로 변하기 쉽다. 동정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에서는 부정적이라 생각한다. 

공감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과정이라 표현한다면 동정은 상대의 마음에 압도당하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 마음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신호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그 표현에 귀 기울인다면 보이진 않더라도 느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안 좋은 일을 경험하게 되었을 경우 그 감정이 얼굴 표정으로 혹은 신체적 증상으로 표출되게 된다. 아무 이유 없이 몸살이 난 것처럼 아프다던지, 가슴이 갑갑한 느낌이 지속되는 등 우리의 몸은 마음을 표현하는 거울과도 같다.


나도 동정과 공감을 혼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보호사로 재직하던 시절 근무 시작한 지 이틀 만에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히스토리를 들어보면 정말 소설이다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사연들이 많다. 신입 보호사였던 나는 환자들에게 있어 관심의 대상이었다. 병동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잘 모르던 때라 선배 보호사님이 하는 일을 따라 하며 나름 열심히 적응하던 중이었었다. 그러다 한 환자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나하고 상담을 하자니 이게 뭔 소리야. 난 의사도 아닌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경험했던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도움을 주리라 마음을 먹고 환자와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환자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내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환자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들을 내게 들려주었다. 


"사회에서 이런 일을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했고 그로 인해 지금 이 상황까지 왔고..."


30여분이 넘게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 울컥하기도 했고 분노가 치솟기도 했었다. 대화를 마친 후에도 그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었다. 마치 내 일처럼 느껴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간신히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길,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터덜터덜, 기운 없는 발걸음이 계속되다 집에 도착하여 의자에 앉는 순간 울음이 터졌다.

울고 있는 나 조차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진정이 되었고 나는 그 환자의 이야기에 공감을 한 것이 아닌 동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경험하던 사회에서는 흔히 겪을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그 환자에게 과하게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된 것이었다.


역전이란 정신분석 용어로 환자와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환자의 전이에 대한 치료자의 무의식적 반응을 뜻하는데, 예를 들어 환자는 무의식 중에 과거 아버지에게 느꼈던 분노라는 감정을 치료자에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을 '전이(transference)'라고 한다면 역전이는 그 반대의 개념이다. 이성적이고 침착한 치료자는 환자의 반응이 전이의 반응임을 알아채고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지만 치료자도 사람이기에 환자가 분노라는 감정을 나타날 때 무의식 중에 똑같은 분노로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전이이다.


그 환자가 나에게 이야기했던 내용들이 나로 하여금 내가 경험했었던 과거의 일을 상기시켰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환자에 대한 연민이 아닌 내 스스로 자기연민에 빠져 펑펑 울었던 것이었다. 신입 보호사의 독한 신고식이었던 셈이다. 그 후에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감과 동정 사이에 혼동하던 때가 많았지만 그런 시행착오들을 겪었기에 지금의 나는 적어도 예전보다는 공감을 하려 노력하는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위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상대의 고민에 대해 판단하지도 동정하지도 말고 공감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어쩌면 참된 위로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각자의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지만 애석하게도 그 고민들은 다 자기의 몫이다.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 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말한다 해서 그 고민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고민의 해결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며 끙끙 앓다가 상담사 혹은 정신과 전문의를 통해 상담을 받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래도 전문가이기에 다른 누군가보다는 내 고민과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바람이 담겨 있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유독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 하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이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정신과 진료의 현실은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정신과 진료방식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진료 특성상 많은 환자들을 단시간에 상담해야 하기에 약물로 먼저 치료를 시작하고 정작 중요한 상담 시간은 턱없이 짧은 편이다. 각자가 살아온 삶이 다르고 문제들이 다 제각각인데 그 삶을 나누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상담하려면 한 사람당 최소한 30분은 잡아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는 길어야 10분 이상의 상담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의사에 비해 환자 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약물치료를 시작하면 불안, 우울, 불면 등 경미한 신경증 증세들은 호전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뿌리 속 깊은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내면에 남아있기에 약 복용을 중단하게 될 시에는 다시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는 만성화 양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만큼 마음을 나누고 위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의 문제들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인가. 해답은 여기에 있다.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 문제들이 어떤 이유로 발생하였든 간에 이미 발생한 문제는 어찌할 수 없다. 다만, 그 문제를 빨리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변화의 첫 단추이다.


자신 주위를 한 번 둘러봐라. 나만 이러한 문제와 고민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지.

모두가 자신만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렇다 해서 모두 같은 반응을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대충 잘 흘려보내기도 하고, 다른 것들로 그 문제들을 대체하려는 시도들도 하며 각자의 방식대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 아니라면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소꿉친구라 할 지라도 살아온 환경과 경험들이 다르기에 내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투정을 부려봐야 그 친구가 내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말을 내게 해준다 한들 그렇게 크게 와 닿지도 않고 오히려 더 답답할 때가 많다.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 때도 있다. 심지어 전문가와 상담을 할 때에도 큰 위로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 참된 위로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하는 시도는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욕구 일지는 모르나 그 욕구는 충족되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위로가 필요하다 느껴질 때, 위안과 편안함이 필요하다 느껴질 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이 자기 확신의 힘은 생각보다 거대해서 내 문제가 해결불능처럼 보일 지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을 흔히 고집불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융통성 없는 확신이 아닌 조금 유동적인 자기 확신을 뜻하는 것이다. 주변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화시킬 줄 알면서도 중요한 본질은 잃지 않는 확신. 그 확신을 가질 때 어떠한 위로보다도 큰 힘이 되어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내 옆에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보이는가.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그 전에 먼저 판단하라. 그 의도가 공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동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공감이라 판단될 때 상대에게 다가가라.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그 감정을 나눠주는 것이다.

어떠한 말도 필요치 않다. 사람을 영적인 존재, 영혼이 있다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서로 교통 할 때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소통 속에서 상대는 위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자. 가장 큰 위로는 공감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가장 큰 위로는 자기 확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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