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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진섭 Aug 16. 2016

감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느껴지는 대로 행동하되 그 결과도 책임질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

살아가다 보면 가슴이 퍽퍽해지는 순간이 있다.

밥을 급하게 먹다 체한 듯, 마음이 체한 것 같은 순간이 있다.

횡단보다 앞 같이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흑색 빛깔로 변해버리는 순간이 있다.


고민이 있거나, 생각이 많거나, 근심 걱정이 있거나. 사람은 신경 써야 할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직업, 일과 관련된 것일 수도, 가정문제 일 수도, 연애 문제 일수도 있다. 그 많고 많은 '문제'들이 가진 공통된 분모는 무엇일까.


어쩌면 '감정의 움직임'이 아닐까. 


'무관심이 가장 무섭다'는 말처럼 주변에서 보기엔 한없이 심각한 일일지라도 자신이 정작 그 일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진다. 내가 만약 지금 어떠한 일 때문에 생각하고, 신경 쓰고, 고민하고 있다면 적어도 내 감정은 그 일로 인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감정의 움직임따라



감정이 움직인다는 것은 내게 있어 그가, 그 일이, 그 무엇이 의미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 요동치는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감정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우린 무의식적으로나마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적절히 타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가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체한 것 같은 이 불쾌하고 지워지지 않는 느낌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정체를 발생시킨다. 내 감정이 움직이는대로 행했을 때의 이미지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이미지가 선명히는 아닐지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지기에 그 이미지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싶으면 지레 놓아버리기 쉬운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놓아도 놓은 것 같지 않는 그 상태에 머물고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개념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 같다. 쉽게 말해, 이드는 욕망, 초자아는 규범, 자아는 중재자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욕망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이드와 초자아 사이, 자아라는 필터를 통과한 감정의 덩어리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을 제한해야 할 때, 내면에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는 것은 자아라는 중재자가 강렬한 이드의 욕망과 엄격한 초자아의 규범 사이에서 조율하느라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그 욕망을 분출하고 싶은데 함부로 그러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워온 그 규범들이 항상 들어맞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항상 옳지 않은 것만도 아닐 텐데. 


감정의 움직임따라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인 걸까.



감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그와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불같이 사랑했고 항상 함께였다. 그렇게 1년, 2년, 10년.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사랑도 위기에 봉착한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끊이질 않던, 행복에 몸 둘 바 모르던 달콤 야릇한 감정들은 사라진 지 오래, 사랑이란 감정보단 우정이란 감정이 적절할 만큼 무덤덤해졌고 시들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이별을 결정한다. 


모든 사람들이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흔히 TV 드라마 속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연애의 구조가 아닐까. 쉽게 이별을 결정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마음이 뚫린 듯한 허전함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마치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는데 뒤늦게야 그 소중함을 절실히 통감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가 느끼는 감정이 이별의 아픔이 아닐까. 물론 더 비극적인 헤어짐도 있겠지만 느껴지는 감정이 아픔이라는 점에서는 같지 않을까 싶다.


특별히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단지 사랑만 했음에도 그 관계가 끝났을 때 아픔이란 감정이 수반된다. 열렬히 사랑했던 만큼 아픔 또한 강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랑에 아픔이 있는 사람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다시 아픔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의 무의식적인 발버둥이 아닐까.


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감정들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갈망하는 욕망들이 클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시켜 현재 느끼는 그 감정들이 옳은 것이라 포장하기도 하기에. 하지만 그 경계가 꽤 애매해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쉽사리 결정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실수'들을 한다. 때론 책임지기 힘든 실수들을 해서 진땀을 뺄 때도 있다. 그 모든 시행착오들을 통해 자신만의 인생의 정답지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감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컴퓨터 자판으로 타이핑 치는 것처럼 항상 의식적으로 특정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감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면, 그 감정으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하고 싶다면, 그 행동이 그 감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면.


'감정의 이끌림으로 인한 시행착오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단, 그 행함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책임도 넉넉한 마음으로 감당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잊지 말자.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감정이 없이 살아간다는 건 로봇과 다를 바 없기에 현재 느껴지는 감정들이 설령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아끼고 보듬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충만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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